| 한자 | 義軍府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항일 무장 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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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이범윤, 김현규, 허은 |
| 설립 시기/일시 | 1919년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연길시 |
1919년 3·1 운동 이후 공교회가 조직한 만주 지역 항일 무장 단체.
의군부의 조직은 군사 행정 조직과 무장대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군사 행정 조직은 총재 이범윤(李範允), 총사령 김현규(金鉉奎), 참모장 진학신(秦學新), 총무부장 최우익(崔友翼), 군사부장 김청남(金淸南), 외교부장 신립(申立), 통신부장 지장회(池章會), 서무부장 이을(李乙), 재무부장 김종헌(金鐘憲), 군법부장 박재눌(朴載訥)으로 구성되었다.
무장대 조직은 대대장 허은(許垠), 부대대장 강창대(姜昌大), 참모장 박재눌(朴載訥), 참모 고평(高平), 재무 강영찬(姜永贊), 헌병대장 최상운(崔相云), 군기 감독 강문주(姜文柱)이었다.
의군부의 병력은 200여 명 규모였으며, 허은이 인솔하는 180명이 북로 독군부 제1대대로 편성되었다. 본부 근거지는 연길현 의란향 북구(北溝), 연화동(蓮花洞), 왕우구(王隅溝), 고성촌(古城村) 등지였다.
의군부는 단체의 존립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군자금 모금에 심혈을 기울였다. 모연대장 이제안(李濟安, 이칭 李相洛)은 1920년 3월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였다. 이제안은 이주 한인들에게 모금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자칫 한인사회의 원성과 동요를 동반할 수 있기 때문에 군자금 모집 대상지를 국내로 돌렸다. 그는 국내에서 의군부로 찾아온 정헌태, 봉재룡, 백이흥, 이정기를 일정 기간 교육시켜 다시 국내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20대 전후의 열혈 청년들로 정헌태처럼 경성보통학교 재학 당시 3·1운동을 경험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사도 있었다. 이들은 의군부 참모부장 고평(高平)의 명령으로 전위대원 100명과 함께 연길현 난구난곡(蘭溝南谷)에 매장하여 놓은 장총 80정을 꺼내서 병식제련을 받았는데, 그 장소는 연길현 위자구 부근이었다.
이범윤(李範允) 등은 항일적이면서도 복벽주의와 위정척사 사상에 깊어 1920년 3월 하마탕(蛤螞塘)에서 국민 회의로 개최된 각 단체 대표들의 연합을 위한 연석 회의에서 국민회 등 단체가 민주 공화제인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기에 연합을 거절하였다가 홍범도와 다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남공선(南公善)·안정근(安定根) 등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설득에 1920년 7월 회의에서는 연합을 승인하였다. 의군부 무장대의 허은·고평 등은 연합에 적극적이여서 홍범도군과 연합 작전을 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군의 간도 침공 때 의란구 지구는 일본군의 4~5차나 되는 토벌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이때 의군부 총무 최우익, 서무 이을 등 13명은 고성촌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참모장 박재눌, 중대장 김도삼 등 40여 명은 의란구 봉전동으로부터 왕청현 소백초구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허은·고평 등이 인솔하는 의군부 주력은 밀산 일대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대한 독립군단에 편입되어 러시아로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