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간도 국민회

한자 大韓 間島 國民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한인 자치 단체
설립자 구춘선
설립 시기/일시 1919년 3월
해체 시기/일시 1920년
최초 설립지 길림성 왕청현
정의

1919년 3월에 조직된 북간도 한인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 단체.

개설

대한 간도 국민회에서 일어난 3·13만세 운동을 주도한 간도독립의사부에서 비롯되었다. 이 단체는 1919년 2월 설립되었다. 이후 조선독립운동기성회로 바뀌었는데, 1919년 3월 말, 연해주에서 조직된 대한 국민의회의 운동 방침에 따라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는 취지에서 대한 간도 국민회로 개칭하였다. 조직 구성은 회장 구춘선, 부회장 강구우[후기 서상용], 총무 김규찬 등이었다.

설립 목적

대한 간도 국민회는 1919년 3·1운동 이후 한반도에서 많은 한인이 간도에 이주하자,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王淸) 등의 대표들은 단체 통합의 필요성에 조직되었고 처음에는 자치 기관 성격이 강하였으나, 점차 무장 투쟁 단체로 전환해 갔다.

변천

대한 간도 국민회는 1919년 3·1운동 전후로 조직된 간도독립의사부·조선독립운동기성회에서 비롯되었다.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연길(延吉)·왕청(汪淸) ·화룡·혼춘(琿春) 등지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필요성이 대두하자,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논의한 결과 임시정부 소속 대한 간도 국민회로 통합하였다. 1920년 일제의 이른바 ‘간도 대학살’ 당시 조직이 와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한 간도 국민회는 1920년 이후 기존 자체 단체의 성격에서 벗어나 무장 항일 투쟁으로 전환해 갔다. 먼저 대한 간도 국민회는 청년들을 조직, 훈련하여 지역의 안전을 담당하는 경호대와 항일 무장 투쟁을 준비하는 국민회군으로 나누었다. 경호대의 총사령에는 이용을, 국민회군의 사령에는 안무를 임명하였다. 국민회군은 1920년 5월,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에 사관훈련소를 세우는가 하면, 홍범도대한 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훈춘한민회의 군사부, 신민단의 독립군과 함께 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이를 위해 대한 간도 국민회는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독립자금을 모금하고자 지방 총회로 하여금 군자금과 군량 등 의무금을 징수하게 하였다.

현황

대한 간도 국민회는 기존 기독교장로회 교구를 기반으로 중앙총회 아래 중부·동부·남부·서부·북부 등 5개의 지방총회를 조직하였다. 본부는 초기에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하마탕(蛤蟆塘)에 있었는데, 후기에는 지인향(志仁鄕) 의난구(依蘭溝) 구룡평으로 옮겼다. 지방총회는 훈춘현을 제외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에 두었다.

대한 간도 국민회는 회장 구춘선(具春先), 부회장 강구우(姜九萬, 강구우), 비서 고동환(高東煥), 서기 김정(金精), 재무 김규찬(金圭燦), 경호 부장 박두화(朴斗和), 편집 부장 이완(李完), 통신 부장 최윤주(崔允周) 등으로 구성되었다. 동부지방 총회[회장 얀도헌]는 연길현 지인향 화령촌(花嶺村)에, 서부지방 총회는 연길현 숭례향(崇禮鄕) 묘구(廟溝)에, 남부지방 총회[회장 마진]는 화룡현 지신사(智新社) 장재촌(長財村)에 두었고, 북부지방 총회는 왕청현 춘화향(春華鄕) 합수평(合水坪)에 각각 두었다.

의의와 평가

대한 간도 국민회는 지방총회 100여 개, 회원 8,000여 명을 가진, 만주 전역에서 가장 큰 항일단체로서 국민회군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기반을 튼튼히 다지면서 무장 독립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祕史)』(대한민국공보처,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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