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南滿州 鐵道 株式 會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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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南满洲铁道股份公司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길림성 요령성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성격 | 일본 국책 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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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 일본 정부 |
설립 시기/일시 | 1906년 |
해체 시기/일시 | 1945년 |
러일 전쟁 직후인 1906년에 일본이 만주지역을 침략하기 위해 세운 국책 회사.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 조약 및 만주에 관한 청일 조약에 따라 러일 전쟁 동안 건설한 군용 철도를 일본의 만주 권익으로서 확립하고 경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영의 주체가 어디에 있는지가 문제였다. 군용 철도는 본래 육군성에서 건설하였으며, 당연히 주체도 육군성이었는데 종전 이후에는 민정 이양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여기에는 영국과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만주의 문호 개방을 둘러싸고 1906년 3월 19일에 영국이 항의한 데 이어, 26일에는 미국도 같은 취지의 항의를 해왔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탐지한 일본은 1906년 5월 22일 이토한국 통감이 주재하는 회의를 개최할 수밖에 없었다. 이 회의에서는 군정과 민정의 설전이 오고갔지만 결국 이토가 주장한 ‘러일 전쟁에서 지지해준 영국과 미국 두 나라의 이권 보호를 위해’ 군정의 폐지가 결정되었다. 만주 문제 협의회에서 이토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했던 참모 총장 고타마 겐타로[兒玉原太郞]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처럼 만철의 설립은 일본이 만주에서 군정을 민정으로 전환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영국과 미국의 만주 문호 개방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대륙 침략을 좀 더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책 회사로서 철도뿐만 아니라 탄광, 철광업 등 다양한 형태의 침략적 사업을 수행하였다.
1906년 설립된 만철은 일본 최대의 국책 회사로 성장한 후 1945년 일제의 패망 후 해체되었다.
1906년 7월 13일 고다마를 설립 위원장으로 한 만철 설립위원회가 성립되었다. 80명으로 구성된 만철 설립위원회는 군부와 재무성, 체신성 등 정부 관계 기관의 인맥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국책 회사의 성격을 띠고 출발하려 했던 만철은 위원장 고다마가 그해 7월 25일 급사하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였다. 바로 전날 고다마와 접견한 고토 신페이였다.
1906년 11월 초대 만철 총재에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임명되었다. 고토는 이미 타이완에서 저항 세력을 회유하여 식민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한 인물로 정평이 났다. 그는 만철의 궤도를 광궤로 바꾸고 대련항을 건설하고 중국 최대 탄광인 무순 탄광을 개발하였으며, 야마토 호텔의 경영에 착수하였다.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면서 일제의 대륙 침략의 무력적 기반을 숨기면서 만철 경영에 착수하였다. 이 가운데 만철을 지탱하는 주요 사업은 역시 철도였다.
일본이 러일 전쟁의 전과로 획득한 만주 지역을 보다 조직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만든 국책 회사로서 현재 일본아시아 경제 연구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