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역사/근현대 |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미국 |
| 시대 | 현대/현대 |
한국 전쟁 당시 긴급 구호로 시작된 미국 사회의 한국 전쟁고아 입양의 두 얼굴.
한국 아이들의 미국 입양의 역사는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생겨난 전쟁고아들에 대한 긴급 구호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전쟁고아가 미국 언론 매체에서 인도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커다란 감성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에는 의복이나 장난감 등의 단순한 자선이나 후원 행위에 머물던 미국인들이 차츰 직접 아이들을 입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 것이었다. 미국 사회의 ‘후원’에서 ‘입양’으로의 이런 관심 변화는 ‘부모’의 관점에서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유대를 형성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국 전쟁고아의 해외 입양은 인도적인 구제 활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냉전 체제 안에서 미국의 공산주의 ‘봉쇄’라는 아시아 정책의 일환이었다. 전쟁의 폐허와 가난으로부터 서양 기독교 가정으로의 전쟁고아 입양은 당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한국과 한국 아이들을 지켜주는 평화의 수호자로서 미국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민사적으로 보면 한국 전쟁고아의 입양과 더불어 아시아 아동의 국제적 입양이 시작되어, 그동안 배제되어 왔던 동양인들의 미국 이민을 보다 용이하게 만드는 분위기 조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전쟁고아의 미국 입양은 1953년에, 한국 주둔 미 해군 주변에서 구걸하며 배회하던 전쟁고아 무리들 중 한 명이었던 당시 4살 반의 이경수라는 전쟁고아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60여 년 동안 대략 20만 명의 한국 아이들이 외국으로 입양되었다. 그중에서 15만 명은 미국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미국 시민이 입양한 외국 출생 아이들의 최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미국 가정으로 보내진 15만 명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해외 입양이 시작된 이래 모든 입양아의 75% 이상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오랫동안 입양은 해외 입양, 특히 미국으로의 입양과 동의어였다. 세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규모와 지속성을 지닌 한국과 미국 간의 입양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변은 지난 반세기 미국이 한국에 행사한 지정학적, 문화적 영향력을 이해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한국 전쟁 후 황폐화된 남한의 재건은 자유세계 국가들의 원조, 무엇보다 미국의 지원을 고려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은 1970년까지 한국 국민 총생산의 1/10에 해당하였다. 당시 한국의 ‘빅브라더’로서 미국의 지위는 그 누구에게도 의심되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에서 단순히 북으로부터의 공산주의 위협을 막아주는 자유주의의 수호자로서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미국은 근대화 일체, 즉 부, 민주주의, 박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황폐화된 한국 사회는 미국의 원조에 기반을 두고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압도적인 힘은 누구든 미국에 가면 잘살 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낳았고 이른바 ‘미국병’을 조장하였다. 전쟁고아, 즉 버려진 한국 아이들의 미국 가정 입양은 한국 사회에서 이렇다 할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장려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미국병’ 덕분이었다. 요컨대 한국 아이들의 미국 입양의 역사는 한국 전쟁 전후의 극도의 불안정한 정치적 맥락으로부터 연원한다.
한국 전쟁 3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끝나자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겨났고, 50만 명의 과부와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생겨났다. 전쟁고아들의 한국 내 가정으로의 입양은 심각한 경제적 빈곤과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관으로 인해 비현실적이었다. 대안은 해외로의 입양이었다. 빈곤에 처한 많은 아이들 중 혼혈 아동은 한국 정부와 민간 입양 주선 기관에 의해 해외 입양 대상 아동의 일순위로 고려되었다. 이러한 민간 입양 기관들은 월드비전 또는 홀트아동복지회와 같은 기독교 계열의 미국의 구호 단체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른바 ‘전쟁고아’들은 처음에는 전쟁 통에 부모를 잃어버린 한국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전쟁과 더불어 미군이 한국에 정착하자 버려진 상당수의 ‘전쟁고아’들은 혼혈 아동이었다. 이들 혼혈 아동은 한국 전쟁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 한국 내 미군 기지에 주둔한 미군과 ‘기지촌 여성’이라 불린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부의 버려진 혼혈 아동의 어머니는 전쟁이 수반한 강간의 희생자들이었다. 또 다른 어머니들은 임신 사실이 드러나자 애인인 미군에게 버림받은 여성들이었다. 애인인 군인 남편이 전사하는 바람에 홀몸이 된 여성들도 있었다.
1954년 한국 정부는 한국 사회에서 배척받는 이 혼혈 아동들을 외국 입양, 특히 그들 아버지의 나라인 미국에 보내기 위해 한국아동양호회를 설립하였다. 홀트아동복지회가 전체 입양의 50% 이상을 처리하였다. 이 시기 입양은 당시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들과 그 가족, 그리고 미국 내 민간인에 의해 전쟁고아에 대한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정전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약 8,000명의 아이들이 미국의 기독교적인 가정에 입양되었고 그중 대다수는 혼혈 아동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미국에서 국제 입양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직후 매년 500명의 한국인 고아들이 입양을 목적으로 미국 입국을 허가받았다. 그러나 한국인 고아들에 대한 미국 가정의 수요가 커지자 「난민구호법[Refugee Relief Act]」을 통해 1956년까지 4,000명 고아들의 미국 입국이 허락되었고 그 다음 해 미국 의회는 고아들에 대한 비자의 상한선을 없애버렸다. 국제 입양이 지금은 전 세계적 수준에서 영구적으로 제도화된 아동 복지 사업이 되었지만, 국제 입양은 애당초 한국에서 긴급 구호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대에 미국 언론 매체에는 한국의 전쟁고아들이 미군 병사의 감성적 애착의 대상이자 구조의 대상으로서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실제로 미군 병사들은 한국 전쟁 시기와 그 직후 전쟁고아들을 일종의 ‘마스코트’로서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바로 이들 ‘마스코트 보이’들이 자신을 보살피던 미국 군인과 미군 가족에 의해 입양된 최초의 전쟁고아들이었다. 비록 한국 정부가 국제 입양을 긴급 조치로서 추적하도록 뒤 흔들어놓은 것은 혼혈 아동의 등장이었다 하더라도, 미국인에 의한 첫 번째 입양 아동은 대체로 ‘마스코트 보이’로서 순수한 한국 아이들이었다.
1953년 11월 30일자 『라이프』는 「새로운 미국인이 ‘고국’으로 오다」라는 기사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최초의 전쟁고아 이경수(Lee Kyung Soo)를 소개하였다. 이경수가 자신을 입양한 미 해군 상사 팔라디노를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입양 절차를 밟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그리고 이제 고국이 된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알라미다 해군 기지에 도착한 팔라디노의 눈 주위에 깊이 패인 다크 서클은 팔라디노가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엄청난 난관을 겪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최초의 전쟁고아 출신 한국인 입양아를 위한 기자 회견이 열렸다. 이경수는 팔라디노와 팔라디노의 친구들로부터 익힌 영어로 차분히 답변에 임하였다. 기자들이 물었다. “카우보이 되고 싶니?” 이경수의 답변은 정확하였다. 계속해서 기자들이 이경수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미국에 있다.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이경수가 답변하였다. “카우보이 총과 모자” 그리고 이경수는 팔라디노의 코를 만지면서 응석을 부렸다.
이경수가 미국에 도착한 뒤 며칠간의 행적을 동행한 기사에 따르면, 이경수는 처음 미국 땅을 밟은 몇 시간 동안 아이는 인사하고,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사람들을 포옹하면서 긴장에서 풀려난 악의 없는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기사는 이경수가 뉴욕주 뉴로셸(New Rochelle)에 있는 ‘아부지’ 가족 집을 향해 떠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이경수는 뉴로셸에서 조부모, 삼촌, 숙모 그리고 사촌들로 구성된 32명의 가족 구성원의 일원이 될 것이고 이경수가 새로 형성된 가족의 따뜻한 품안에서 희망찬 미래를 맞이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경수를 입양한 미국에서 이경수의 처음 몇 년간을 기록한 신문 기사들에 따르면 이경수는 통통하고, 보조개가 들어간 뺨을 가진 한국인 소년이었다. 이경수는 해군 상사인 빈센트 T. 팔라디노(Vincent T. Paladino)에 의해 입양되어 리 팔라디노(Lee Paladino)로 개명되었다. 『라이프』 기사는 팔라디노가 이경수를 발견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지난 해 미 해군 주변에서 먹을 것을 찾아 구걸하고 싸움질하면서 배회하던 한국 고아들 중에 덩치가 가장 작고 가장 외로움을 타며 다른 아이들한테 가장 쉽게 떠밀려 밖으로 내쳐지는 아이가 있었다. 그는 4살 반 이경수였다. 식당 주임 상사 ‘팔라디노’는 이경수를 눈여겨보았다. 1952년 11월 팔라디노 상사는 이경수를 번쩍 안아 사병 클럽으로 데리고 가서 침상을 만들어주고 거기서 재웠다. 팔라디노는 침상에 받침대를 세워 이경수가 악몽을 꾸는 동안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팔라디노가 이경수의 가족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이경수에게 더 이상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만 얻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결국 해군 생활 13년 차인, 35살 먹은 총각 팔라디노는 이경수의 가족이 되었다. 팔라디노는 아침에는 아이를 한국 유치원에 보냈다. 오후에 이경수는 승무원 극장에서 미국 영화를 시청하였다. 이경수는 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웃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미 해군 함선에서 이경수를 ‘마스코트’로서 성심껏 보살피던 중 팔라디노 상사는 본국 근무를 발령받았다. 이경수와 헤어지기 싫었던 팔라디노는 이경수를 입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팔라디노는 이경수를 미국으로 데려오기까지 굉장히 힘든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미국과 한국 사이의 입양 제도가 아직 마련되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라디노는 이경수를 데리고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까다로운 입국 비자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호놀룰루 공항 당국은 이경수에게 미국 입국 비자의 발급을 거부하였다. 이경수는 출입국 관리소의 보호소로 보내졌다. 팔라디노 역시 아이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함께 보호소로 가야만 했다. 그것은 새로운 부임지로부터의 무단이탈이라는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였다. 온갖 서류들이 워싱턴, 호놀룰루, 도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정리되는 동안 이경수는 텔레비전과 만화를 보면서 지냈다. 6일을 기다린 끝에, 이민국의 판결이 나왔다. 이경수는 일단 이경수의 임시 비자가 유효한 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적합한 비자를 받은 뒤, 미국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미 해군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미국의 적법한 절차를 지키면서 이경수와 팔라디노가 합법적으로 미국에 입국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이경수는 하와이에서 재미 한인들로부터 김치와 카우보이 총을 선물 받았다. 이때 이경수가 보인 반응은 “와우!”였다. 그것은 이경수가 구사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영어 단어 중에 하나였다.
이경수의 미국에서의 첫 생활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경수는 뉴욕주 뉴로셸의 한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이경수가 처음으로 학교에 등교한 날은 보다 큰 볼거리가 되었고 뉴스거리가 되었다. 이제 리 제임스 팔라디노(Lee James Paladino)가 된 이경수는 아무런 문제없이 미국 학교 수업을 따라잡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이경수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는 이경수의 삶이 순탄치 않았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1958년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 따르면, 이경수의 양아버지가 결혼하고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 마찰이 생겼을 때 이경수는 복지 기관으로 넘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경수는 또 다른 수양 가족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결국 이경수는 팔라디노의 부모님이었던 이경수의 입양 조부모에게 합법적으로 입양되는 것으로 이경수에 관한 공식 기록이 끝이 난다. 이경수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전쟁고아 출신으로 미군 병사에게 입양되어 미국으로 건너온 이경수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한국 전쟁 여파로 인한 한국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는 미국 사회에서 동정과 후원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1950년대 초반 미군의 자선 행위를 보도하는 언론 매체에 한국의 버려진 아이들은 ‘거지’ 또는 ‘고아’로서 단골 등장 메뉴였다. 언론 매체에 실린 한국의 전쟁고아 또는 거지에 대한 기사들과 사진들은 한국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미국의 사회적 상상 속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53년 10월 17일자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 기사에는 「미군 병사가 한국의 전쟁고아에게 옷을 입혀주다[GIs Clothe South Korean Waifs]」는 제목 하에 자그마한 한국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있는 미군 병사가 등장한다.
“한 때 모든 한국인을 ‘끈적이들[gooks: 동남아시아인들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이라고 불렀던 최초의 미군 병사들이 이제 일련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 이것은 애정과 존중이 이전의 회의론을 상당한 정도로 대체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수의 미군 병사들은 이전에는 한국 관습이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한국 정치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미군 병사들은 한국의 비공식적 구호 활동 중 가장 긴급한 분야, 즉 거지가 되어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한국 아이들을 위한 원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애걸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누더기 옷을 걸친 거지들은 미군들로 하여금 한국 상황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기사는 미군 병사들은 애당초 노골적인 인종 차별주의와 문화적 ‘회의론’을 지니고 있었지만, ‘애걸하는’ 전쟁고아들을 보고 난 뒤 전쟁고아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노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러한 회의론을 극복 할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사진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자비로운 미군 병사는 버려진 한국 아이를 위한 일종의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미군 병사들은 가난한 제3세계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옷을 입히는’ 가부장의 역할을 떠안음으로써 애당초 품고 있었던 인종적인 편견과 문화적인 멸시를 훌쩍 뛰어넘었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기사가 강조하듯이 미군 병사들은 아이들에 대한 보편적인 인류애를 기반으로 비인간적 전쟁의 맥락에서도 자신의 인류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미군 병사들은 비인간적인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훼손된 도덕적 자긍심을 자선 활동을 하는 ‘미국인’의 자질을 바탕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아이의 해외 입양 역사에서 미군 병사가 수행한 양가적인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미군 병사는 고아원의 주요 후원자이자 고국의 미국인들의 자선 기부를 위한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미군 병사 중 어떤 이는 불법과 위선의 탈을 쓰고 자기 아이들을 버린 아버지였다. ‘전쟁고아’라 불린 한국의 혼혈 아이들은 남성인 미군 병사와 한국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아니었던가? 미군 병사들이 맺은 한국 여성과의 관계에서 혼혈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미군 병사는 자신의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을 버렸고 그럼으로써 아버지로서의 실제적인 책임을 회피하였다. 한국에서 이 아이들은 한국인과 섞일 수 없는 혼혈아로서, 기지촌에서 태어난 ‘더러운 아이들’로 낙인찍혔다. 한국에서 해외 입양의 커다란 첫 물결은 바로 이러한 미군 병사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혼혈 아이들의 입양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미군 병사의 양가적인 역할에서 미국의 인도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착취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미국의 야누스적 얼굴은 1950년대 이후의 미국과 한국 간의 신식 민주주의적인 관계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낸시 아벨만 앤드 존라이(Nancy Abelmann and John Lie)[1995]는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기술하면서 “군사 및 민간의 접촉을 통해 미국은 물질적인 갈망의 대상임과 동시에 물질주의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나아가 영웅적인 구원자임과 동시에 반동적인 침입자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위 『사이언스모니터』 기사는 미군 병사들이 한국에서 자신들의 의무를 완수하고 어린 한국 소년들, 즉 마스코트를 대동하고 공항에 도착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미군 남성의 ‘영웅적인 구원자’로서의 메타포적인 연상이 바로 이와 같은 한국의 전쟁고아에 대한 미국 언론의 이미지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 되어 제시된다.
1952년부터 미국 언론은 미군 병사의 부모가 때로는 미군 병사 자신이 직접 한국의 소년 소녀들을 어떻게 입양했는지에 대해서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보도들은 미군 병사들이 한국 정부가 국제 입양 정책이나 법령을 갖추지 못한 기간 동안 그리고 미국의 인종 차별적인 이민 정책이 모든 아시아계 사람들에 대해 사실상의 입국 차단을 하고 있을 때, 엄청난 끈기와 개인적 관계를 통해서 전쟁고아인 한국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음 강조한다. 실제로 초기에 한국 아이들을 입양한 군인들 또는 군인 가족들 중 다수는 군대를 통해 특별한 통관 절차를 밟았거나, 아니면 사적인 청원서를 제출하여야 했다. 전쟁고아로서 최초로 미국 땅에 들어온 이경수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입국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들은 비록 혈연에 의한 것은 아니라할지라도 의심의 여지없는 가족관계에 있음을 증명해야만 했다. 입양이 시작된 처음 몇 년간은 기혼 부부가 이른바 전쟁고아의 양부모의 상당한 정도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미군의 순환 근무는 미군이 입양 기관의 규약 및 국내 입양의 표준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들 기혼 부부 외에도 당시 독신이었던 미군 병사들 역시 한국의 소년들을 입양하려고 노력하였다.
한국 고아를 다루는 미국 언론은 미국 사회 내에서도 감성적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다수의 미국인들은 한국의 전쟁고아와 혼혈아에 대한 언론 매체의 이미지에 공감하여 한국 정부와의 접촉을 통해 돈, 의복 및 장난감을 고아원 등에 기부하였다. 또한 단순한 자선적 지원 행위에만 그치지 않고 이 아이들을 어떤 식으로 자신의 가족 속으로 입양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문의하는 미국인들도 대거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50년 밥 피어스(Bob Pierce) 목사에 의해 설립된 월드비전은 아시아 고아들과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금전적 지원을 조달하는 후원 프로그램을 조직하였다. 1950년대 말까지 19개국의 아동을 원조했지만 당시 주요 원조 대상은 한국의 전쟁고아들이었다. 이때 월드비전의 지원 프로그램은 ‘부모’로서의 미국인의 감성을 자극하였다. 월드비전은 ‘부모’로서 자신의 ‘아이’, 멀리 떨어져 있는 소중한 어린 생명을 위해 매달 10달러를 내는 북아메리카 친구들을 모집하는 캠페인을 벌렸다. 월드비전이 당시 시행한 후원 프로그램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불쌍하고 무력한 아시아인 자식들을 후원한 가족적인, 더 정확하게는 부모의 관점에서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유대를 형성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자 초기에는 후원자로서 자선 행위에 그치던 미국인들이 점차 입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원할 당시 이미 그들은 ‘부모’의 심정을 느꼈다. 한국의 전쟁고아들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미 자신들의 ‘아이’들이었다. 초기의 후원 행위가 합법적 입양에 대한 욕구로 귀결된 것이다. 1955년 C부부의 사례는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시를 보여준다. C부부는 미국 오리건 주의 한 지방 공공복지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자신들이 혼혈 한국인 여아를 입양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 공공복지위원회는 고아들의 사진을 관리하고 미국인에게 기부를 권유하는 문서를 배포하는 부서였다. C부인은 고아들의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한 아이의 사진을 보고는 남편과 함께 아이에게 돈과 옷을 보내 후원을 시작하였다. 몇 달간의 후원 뒤, C부부는 자신들이 사는 카운티의 공공복지위원회에 합법적 입양이라는 목적 하에 아이를 미국에 데려올 수 있는지 상의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국제 입양 사례는 미국 오리건주의 홀트 부부가 8명의 한국인 아이들을 입양한 경우이다. 월드비전은 해리 홀트가 1955년 10월 미국으로 12명의 한국인 입양아를 데려 오는데 도움을 주었다. C부부를 포함한 다른 세 미국 가정이 이 아이들 중 4명을 입양하였다. 홀트 부부가 8명의 아이들을 입양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데 앞장 선 뉴버거 상원 의원은 한 유명한 연설에서 홀트의 입양 행위를 “매우 가치 있고 인도주의적인 선교 활동”이라고 치켜세웠다. “한국이라는 황폐하고 고통 받는 나라의 작은 여덟 아이들에게, 미국에서의 안전과 위로를 베푸는 것보다 더 고귀하고 이타적인 행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형제애가 아직 의미가 있다면, 해리 홀트와 해리 홀트의 가정은 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주류 언론들은 1955년 10월 해리 홀트가 12명의 한국 아이들을 데려온 것을 널리 알렸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는 해리 홀트를 “12명의 한국 아이들을 복잡한 도쿄 국제공항을 거쳐 [...] 미국의 새 가정으로 데려다줄 비행기까지 인도한 마술피리 부는 사나이”라고 묘사하였다.
한국 전쟁 중 고아가 된 어린이는 미국 언론 매체에서 인도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전쟁고아는 전쟁이 끝나자 해외 자선 단체의 주요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미국에 본부를 둔 국제사회복지서비스[International Social Service]의 수잔 T 페티스(Susan T. Pettiss)는 1954년 자신의 동료들에게 전쟁고아의 문제를 직시하고 국가 간 입양 문제를 현안으로 처리할 것을 당부하였다. 국제사회복지서비스는 20세기 전반에는 이주자, 난민, 추방된 사람들에 대한 서비스 제공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기점으로 한국인 아동의 미국 입양에 초점을 맞추면서 미국 가정의 국제 입양과 관련된 지원으로 주 사업 방향을 틀었다.
당시의 해외 입양은 혼혈 아동에 대한 민간 차원의 인도적인 구제 활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냉전 체제 안에서 공산주의 ‘봉쇄’라는 대아시아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국 전쟁은 냉전이 막 시작되고 미국이 전 지구적 패권을 쥐기 시작한 초기에 일어났다. 미국 가정에 의한 전쟁고아의 입양은 단순히 아이들의 사회 복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패권 국가인 미국에게 고도로 민감한 홍보 문제였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지아이(GI) 베이비’ 또는 ‘유엔(UN) 베이비’는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미국과 냉전적 팽창주의를 폄하하기 위해 채택할 수 있는 무기였다. 이때 전쟁의 폐허와 가난으로부터 서양의 기독교 가정으로의 입양이야말로 당시 팽배했던 냉전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미국을 자유 진영의 지도자, 한국과 그 아이들을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평화의 수호자로 그려내는 데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세계적인 인도주의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한 복음주의 기독교 단체 월드비전 인터내셔널(World Vision International)의 설립자 밥 피어스는 혼혈인 어린이의 입양이 반공주의적 기독교 선전 프로그램의 일환임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였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 전쟁고아에 대한 미국 백인 가정의 대규모 입양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였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로스앤젤레스타임스』 기자 베티제인 러바인(Bettijane Levine)이 표현한 것처럼, “역사상 최초의 국가 간, 인종 간 대규모 입양”으로서 미국 백인 가정에 의한 한국 전쟁고아의 입양이 전개되었다.
크리스티나 클라인(Christina Klein)은 국제 입양의 발단에 대한 미국의 깊숙한 개입과 아시아계 아동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아시아인들은 초기 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는 미성숙한 민족이고, 여성화 되어 그들의 자식을 돌볼 수 없다고 묘사하면서 아시아계 아동들의 입양 혹은 후원을 통해서 아시아인들에게 가족과 같은 끈을 만들어 자비로운 백인 엄마를 연기하려 하는 냉전 정신의 표현이자 가족 사랑에 대한 담론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입양을 미국의 이데올로기 전쟁에서의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미국 이민의 역사적 맥락에 배치하고 고려해야 미국 가정에 의한 한국 아이들의 대규모 입양 현상의 근본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 내내 배제[exclusion]는 아시아인의 미국 이민사에서 핵심 주제였다. 미국의 법률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아시아 민족–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남아시아인, 필리핀에게 낯설고 위험하며 동화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러한 차별은 미국 「이민법」에서 성문화되어 1924년까지 사실상 아시아인의 미국 이민은 금지되었다.
한국 전쟁고아를 대규모로 입양함으로써 시작된 아시아 아동의 국제 입양 관행은 실제적인 이민의 가능성을 만들어내었다. 금지 현실을 뛰어넘어 민족적, 문화적, 정치적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새로운 전망을 형성하는데 일조하였다. 1953년 「난민구호법」 제5항을 통해 10세 미만의 자격을 갖춘 고아에게 4,000건의 특별 비할당 비자가 책정됨으로써 한국인 입양아의 이민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그러자 한국의 이른바 전쟁고아들은 ‘난민’에서 ‘이민자’로 변모되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아시아인들이 미국에 밀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기존의 인종-기반 이민 쿼터제 하에서는 허용되지 않았을 혼혈 및 순혈 아시아계 아이들은 단지 미국 사회에 수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민 및 난민 정책 논의에서 이상화되기까지 하였다.
미 국무부는 “고아는 그들이 젊었다는 것, 유연하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문화와의 연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최상의 이민자를 만들어낸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였다. 인종적 관점에서는 이상적이지 않지만, 한국계 백인 지아이 베이비들은 아시아 이민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구미가 당기게 만들었다. 어린이로서 그들은 그 어떤 경제적 또는 국가적 안전 위협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산주의적 침투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강력하게 난민 정책과 그 시행의 틀을 주조했는지를 감안할 때 매우 중요한 자질이었다. 한국 여아를 입양한 캘리포니아의 한 아버지는 자신의 두 딸을 “내가 만난 가장 열렬한 충성스러운 미국인”이라고 묘사하면서 그들과 다른 한국 어린이들이 “우리나라의 훌륭한 시민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미국 시민권은 ‘아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라고 여겨졌으며 그러한 시민권을 운 좋게 거머쥔 행운아로서 이 아이들은 언젠가는 국가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세계에 기여함으로써 그 은혜를 되갚아 줄 것이라고 주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