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遼寧 地域 靑銅器 文化의 展開와 古朝鮮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요령성 |
| 시대 | 선사/청동기|고대/초기 국가 시대/고조선 |
요령 일대에 고조선과 연관되어 있는 청동기 문화.
청동기 시대 요령 지역은 길림성 중부·연변조선족자치주·연해주 남부·한반도와 함께 예맥 청동기 문화권(濊貊靑銅器文化圈)에 속하여 있었다. 이 일대의 청동기 문화는 예맥 청동기 문화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청동기 제작 기술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령 지역 청동기 문화가 한민족사와 한민족 문화에 더욱 중요한 까닭은 이 일대의 청동기 문화 가운데 일부가 고조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령 지역에 최초의 청동기 문화가 출현한 시점은 기원전 20세기 즈음이다. 기원전 20세기 대릉하(大凌河)와 소릉하(小凌河)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요서(遼西) 지역, 태자하(太子河)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遼東) 북부 지역, 대련시(大連市) 시구(市區)를 중심으로 하는 요동 반도(遼東半島) 남단과 요동 남부의 일부 연해 지역[장하시(庄河市) 서남부와 장해현(長海縣)의 장산군도(長山群島)]에는 각각 하가점 하층 문화(夏家店下層文化)·마성자 문화(馬城子文化)·쌍타자 문화(雙砣子文化)가 형성된다. 물론 이들 문화의 주변 지역이 기원전 20세기 모두 청동기 문화로 전환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전기 청동기 문화는 각 문화가 존속하는 기간 동안 주변 지역의 물질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가점 하층 문화는 기원전 20~15세기의 기간 동안 존속하면서 내몽고 자치구 동남부와 요서 지역에 걸쳐 있으면서 멀게는 하북성 북부의 연산 산지(燕山山地)와 화북 대평원(華北大平原) 북단의 전기 청동기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성자 문화는 기원전 20~11세기의 기간 동안 존속하였는데, 늦어도 후기 단계에는 요동 북부는 물론 요동 남부의 쌍타자 문화와 일정한 교류를 행하였고, 대이수구 유형(大梨樹溝類型)이 요동 동부 지역에 형성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기 청동기 시대의 물질 문화는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대체로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요하(遼河) 사이의 유하(柳河) 유역 등지를 중간 지대로 하여 두개의 다른 문화권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이 시기 요서 지역은 내몽고 동남부와 같은 문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하북성 북부 등지와의 상호 작용을 하고 있었다. 요동 지역은 요동 북부와 요동 남부가 구분되어져 있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에 걸친 상호 작용만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압록강 중하류역의 의주군 일대와 압록강 중상류역의 자강도 일대에 공귀리(公貴里) 유형과 신암리(新岩里)-미송리(美松里) 유형이 형성된다.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0세기를 기점으로 요령성 내 여러 지역에 후기 청동기 문화가 형성된다. 요서 지역에는 이 일대의 전기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 문화는 물론 중간 시기의 청동기 문화인 위영자 유형(魏營子類型)과도 전혀 다른 문화적 계통을 갖고 있는 십이대영자 문화(十二臺營子文化)가 형성된다. 비슷한 시기 요동 지역에는 요동 북부 지역에 이도하자 유형(二道河子類型)·요동 남부 지역에 쌍방 유형(雙房類型)·요동 반도 남단 지역에 강상 유형(崗上類型)·요동 동부 지역에 대이수구 유형(大梨樹溝類型)이 형성된다.
요령 지역의 후기 청동기 문화는 각 지역 물질 문화 전반에 적용 가능한 시대성이 분명한 유물 등을 기준으로 할 때, 전기·중기·후기의 3개 단계로 획기 된다. 전기는 기원전 10~9세기의 기간 동안으로, 이 기간 동안 각 지역 물질 문화의 초기 유형이 형성된다. 중기는 기원전 8~7세기의 기간 동안으로 이 기간 동안 각 지역 물질 문화의 전형이 갖추어진다. 후기는 기원전 6~4세기의 기간 동안으로, 이 기간 동안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기술적으로 더욱 성숙된다. 기원전 4세기를 따로 떼어 말기를 설정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지역에 따라 후기 청동기 문화가 다시 한 번 새로운 지역 유형으로 변동된다.
요령 지역 후기 청동기 문화의 전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에 요령 지역이 지속적인 문화-간·지역-간 상호 작용을 통해 동일한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요령 지역이 동일한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변화이다. 왜냐하면 전기 청동기 시대와 위영자 유형기 까지만 해도 요서와 요동 지역은 전혀 다른 문화와 상호 작용권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요동 지역 또한 전기 청동기 시대에는 작은 지역 범위 내에서의 상호 작용 관계망만이 형성되었을 뿐, 요동 전역이 단일한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였다.
요령 지역이 후기 청동기 시대 동질적인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게 된 것은 십이대영자 문화의 기술적 우위와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십이대영자 문화는 왕팔개자 단계[기원전 9세기], 십이대영자 단계[기원전 8~7세기], 남동구-정가와자 단계[기원전 6~4세기]로 획기 되고 있다. 앞의 두 단계는 십이 대영자 유형(十二臺營子類型)·마지막 단계는 요서 지역의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심양시(沈陽市) 중심의 정가와자 유형(鄭家窪子類型)이 형성되어 있었다. 십이대영자유형기부터 요동·길림성 중부·한반도 지역이 십이대영자 문화의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를 모방하여 지역 형식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호 작용 관계는 기원전 6세기 심양시 일대에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鄭家窪子類型)이 형성되면서 더욱 긴밀해진다.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 자유형의 형성을 계기로 요동 지역에 정가와 자유형을 상위로·기타 요동의 토착 유형을 하위로 하는 상호 작용 관계망이 형성된 것이다. 이 상호 작용 관계망을 통해 요동 지역의 비파형 동검 등이 십이대영자 문화 양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졌다. 묘제 또한 십이대영자 문화류의 석곽묘와 토광묘가 각 지역의 토착 묘제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요동 지역 토착 문화의 지형 또한 변모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쌍방 유형권(雙房類型圈)의 축소와 붕괴이다.
십이대영자 문화 십이대영자 유형은 기원전 6세기를 기점으로 객라심좌익몽고족 자치현(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요서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심양시를 중심으로 요하 양안에 걸쳐 있던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으로 분화된다. 그런데 기원전 6~4세기 요령 지역은 정가와자 유형을 매개로 하여 요서 지역의 남동구 유형과 요동 지역의 소규모 지역 문화가 동일한 상호 작용 관계망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점은 이 시기에 요령 지역의 청동기 양식이 완전히 일체화됨과 동시에 동일한 기술적 속성의 청동기가 유통되는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세기 초를 기점으로 획기적으로 변동된다. 이 시점 이후 요서 지역은 토착 문화 전통의 물질 문화가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그 자리에 전국연(戰國燕)의 지방 문화인 미안구 유형(眉眼溝類型)이 형성된다. 요동 지역은 요서 지역보다는 덜하였지만, 과거 정가와자 유형의 분포권과 요동 남부의 연해 지역이 전국연의 미안구 유형 분포권으로 변모된다. 이 시기 요령 지역의 전국 연 문화 분포 지역은 대부분 기존의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십이 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옛 쌍방 유형·강상 유형과 정확하게 일치된다.
이와 동시에 요동 지역의 미안구 유형 외곽 지역에는 철령시(鐵嶺市)와 서풍현(西豊縣) 일대로부터 길림성 서남부의 동요하(東遼河) 유역에 걸친 지역에 사가가 유형(謝家街類型)이, 청원만족자치현(淸原滿族自治縣) 중북부에 임가보 유형(任家堡類型)이, 대련(大連) 시구를 중심으로 한 요동 반도 남부에 전국 연 문화와 공존하고 있던 윤가촌 유형(尹家村類型)이, 태자하 중상류역 본계 시현(市縣) 일대에 유가초 유형(劉家哨類型)이, 혼강 중상류역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 동부 산간 지역에 대전자 유형(大甸子類型)이, 평양(平壤) 중심의 대동강(大同江)~재령강(載寧江) 유역에 고산리 유형(孤山里類型)과 같은 소규모 지역 문화가 형성된다.
기원전 3세기 요령과 서 북한 지역에 걸친 지역에서 확인되는 전국 연 문화와 기타 토착계 물질 문화 가운데 요령 지역 청동기 문화의 주요한 유물 요소 가운데 하나인 동검이 중심적인 유물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은 윤가촌 유형·유가초 유형·대전자 유형·고산리 유형이다. 이 가운데 윤가촌 유형은 전국 연 문화권 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국연에 점령당한 지역 내 토착 집단의 문화로 볼 수 있다. 유가초 유형에는 조형병식(鳥形柄式) 동검 등 북방계 동검의 속성이 복합된 동검 또한 포함되어 있다. 또한 다뉴 기하문 경(多鈕幾何文鏡)의 제작이 사실상 중단된다.
이에 반해 요동 동부의 대전자 유형과 고산리 유형은 비파형 동검의 후계 형식인 중세형 동검(中細形銅劍)과 세형 동검(細形銅劍) 뿐만 아니라 다뉴 기하문 경 등의 청동기가 유물 복합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요동과 서 북한 지역의 물질 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를 기점으로 새로운 유형으로 다시 한 번 변동되는데, 대전자 유형은 부여계(夫餘系) 동병 철검(銅柄鐵劍)과 적석묘(積石墓)로 상징되는 망강루 유형(望江樓類型)으로 전환되는 반면, 고산리 유형은 세형동검·목곽묘로 상징되는 정백동 유형(貞柏洞類型)으로 변모된다.
청동기~철기시대 요령~서 북한 지역에는 여러 물질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물질 문화의 전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위의 지역 대부분에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각 지역의 토착 문화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물질 문화, 전국 연 문화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기원전 3세기 전국 연 문화는 요서 전역과 요동의 심양 지구에서는 토착 문화를 완전히 대체하였고, 대련 지구 등에서는 토착 문화와 공존하며 주변 지역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태자하(太子河) 중상류역· 혼하(渾河) 상류역· 소자하(蘇子河) 유역· 혼강(渾江) 유역과 대동강(大同江)~재령강(載寧江) 유역에서는 토착 전통을 기반으로 한 유형이 지속되었다.
이 가운데 대동강~재령강 유역이 단연 주목된다. 그 이유는 고산리 유형이 이 지역 재래의 청동기 문화인 신흥동 유형[新興洞類型, 팽이형 토기 문화]이 아닌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을 직접적인 계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한식(漢式)묘제 및 유물과 공반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의 중심이 형성되어 있던 심양 지구에는 정가와자 유형의 유물 복합이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그 자리에 전국 연 문화 관련의 성지· 취락지· 매납 유구 등이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물질 문화 양상은 고산리 유형이 바로 준왕(準王)고조선[고산리 유형 고산리류(孤山里類)]과 위만 조선(衛滿朝鮮)[고산리 유형 송산리류(松山里類)]의 문화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이 바로 준왕 이전의 고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위략』에는 『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조선후(朝鮮侯) 관련 기사가 있다. 『위략』의 기사는 어환(魚豢)이 임의로 왜곡한 것이 아니라 동한(東漢) 당대(當代)의 정사서(正史書)인 『동관한기(東觀漢記)』 지리지(地理志)를 저본으로 한 것으로, 그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 고조선과 연나라가 주변 정세 변화[주(周)나라의 쇠퇴와 연나라의 칭왕(稱王)]와 맞물려 갈등을 빚다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공이 있게 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연나라와 갈등을 빚은 조선후의 고조선은 연나라는 물론 중국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대부(大夫)를 관직명으로 쓰는 등 중국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요령~서북한의 물질 문화 가운데 『위략』 조선후 기사와 가장 부합하는 것은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 외에는 없다. 따라서 『위략』 조선후 기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한다면 조선후의 고조선은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산리 유형의 직접적인 계통적인 기원은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이 아닌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이다. 이러한 현상이 빚어지게 된 배경은 십이 대영자 문화권이 기원전 6~4세기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을 중심으로 하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서쪽의 요서 지역[남동구 유형]과 심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요하 유역[정가와자 유형]의 2개 연맹체로 재편된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기원전 4세기 연나라가 종전까지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 일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하북성 북부 연산산지(燕山山地)의 동남구(東南溝)-옥황묘문화(玉皇廟文化) 집단을 완전히 복속시켜 이 일대를 내지화(內地化)한 후, 바로 동쪽에 인접하게 된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 중심의 요서고조선 연맹체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 결과 기원전 3세기 초 진개가 요서고조선 연맹체를 침공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 요하 유역의 요동 고조선 연맹체의 존재를 파악하게 되어 이마저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사회 체제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정치적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조선열전」에서 진개 침공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하기만 하였고, 『위략』의 저본에서는 최초 공격 대상인 요서고조선 연맹체의 고조선만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
결국 고조선사는 요서 지역의 조양현 중심 십이대영자 문화 십이대영자 유형, 요하 양안의 심양시 중심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 대동강 유역의 평양 중심 고산리 유형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면서, 준왕고조선의 핵심 집단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기원전 6~4세기 요서 지역의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 중심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으로 대표되던 요서고조선 연맹체가 요동고조선 연맹체[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와 병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요령 지역의 후기 청동기 문화와 후기 청동기 시대 요령 지역의 여러 유물·유적은 고조선과 그 주변 정치체·족속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