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고려와 요·금·원과의 전쟁

한자 高麗와 遼·金·元과의 戰爭
중문 高丽和遼·金·元的战争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시대 고려/고려
상세정보
사건 고려의 대외 전쟁
고려와 요의 전쟁

고려와 요의 전쟁은 993년, 1010년, 1019년에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 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 요나라(遼)를 건국하였다. 922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의 태조는 거란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북진정책을 실행하였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태조는 사신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 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행동이었다. 고려정종 때에는 광군(光軍) 30만명을 양성하여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다.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하고자 하였고,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가에 세운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 진화(振化)내원(來遠)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을 준비하였다.

993년 10월 요나라의 소손녕(蕭遜寧)이 6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박양유(朴良柔)와 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는 한편 성종(成宗)이 친히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왔으며 조정에서는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함께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 등의 주장이 난무하였고, 할지론이 대세로 굳어가는 경향을 보였으나, 서희와 이지백(李知白)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를 급파해 소손녕의 화친 제의에 답하였다. 그리고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하여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으며 강제 출가한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고려와 요의 전쟁에서 거란의 실제적인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여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재차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요 성종은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으나 강감찬(姜邯贊)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회군하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와 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고려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1019년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으며, 이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을 하지 않게 되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송-요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한편 고려도 서북지역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하기도 힘들어졌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과 개경 수비를 위해 나성을 쌓았다. 한편,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고려와 금의 전쟁

만주에서 주로 유목생활을 하던 여진족(이전의 말갈족) 가운데 일부는 고려천리장성 이북인 동북면(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들어와 농경이나 어업에 종사하며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처음에 고려에 조공을 바치면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갔는데, 점차 고려의 백성으로 편제되기를 희망하였다. 특히 거란 침입 때는 고려의 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문종 때 고려의 주(州)로 편입시켜 주기를 요청하는 여진인이 급증하자, 고려 조정은 여진 추장에게 관작을 주어 고려의 번병 역할을 하는 기미주(羈糜州)·귀순주(歸順州)로 삼아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 여진 부락 간에 내분이 일어나 완안부(完顔部)가 남하하면서, 여진족은 동북면 지역을 잠식하고 변경에 머물러 고려의 위협이 되었다. 이에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길주(吉州) 북쪽 병목(甁項)지역에 요새를 설치할 목적으로 여진과의 전쟁을 단행하였다.

여진정벌은 고려태조 때부터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여야 할 옛 영토로 인식하고 꾸준히 추진한 북진정책의 결과이다. 하지만 9성을 여진에게 되돌려 주면서 문벌귀족간의 분열이 일어났고, 이 지역을 장악한 완안부 세력은 금나라를 건국하고 만주와 중원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고려에게 사대(事大)를 요구하였다.

고려 시대 최초의 대규모 여진정벌은 1080년(문종 34) 12월 여진족의 소요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 때 문정(文正)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10여 부락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1104년(숙종 9)까지 여진족은 소요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흑수(黑水) 일대에 있던 완안부 세력이 남하하여 가란전〔曷懶甸〕지역의 여진 부락을 통합하고, 1102∼1103년에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1104년에 완안부가 그들에게 항거하는 7성(城)의 부족을 추격하면서 정주(定州)에 이르자, 고려는 이를 공격하였다. 이 때 임간(林幹)은 여진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이어 윤관(尹瓘)이 나아가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여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숙종과 윤관에게 큰 치욕으로 남았고, 정국운영에도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윤관은 패배의 원인이 기병(騎兵)의 열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고, 국왕에게 건의하여 신기군(神騎軍)·신보군(神步軍)·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여 정예 군사를 양성하였다. 1107년(예종 2) 12월 1일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은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여 여진정벌에 나섰다. 그 결과 ‘그 지방이 300리로,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蓋馬山)에 닿았으며 남쪽은 장주(長州)·정주(定州)에 접한다’는 전과를 올렸다. 윤관은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 등 9성을 쌓고 남쪽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면서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주변 지역이 매우 넓고, 또 완안부 세력이 산 속에 거주하면서 집요하게 약탈하며 9성의 반환을 애걸하였고, 여진과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국력이 소모되었으며, 향후 거란과도 다툴 수 있다는 여론에 따라, 고려는 1년 7개월 만에 이주한 백성을 본거지도 되돌려 보내고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고려와 원과의 전쟁

고려가 최씨의 무단정치(武斷政治) 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라는 사람이 나와 몽골족을 통일하였다. 1206년(희종 2년)에 그는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의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후 남하하여 금을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그리고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몽골은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이를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무찔렀다(→강동성 전투).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세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 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 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칭기즈칸의 대를 이은 오고타이 칸(태종)은 1231년(고종 18) 장군 살리타(撒禮塔)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침입에 착수하여,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고려군은 이를 맞아 구주(귀주)·자주(慈州)·서경 등에서 크게 무찌르는 등 선전하였으나 전체적인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갔다. 남하하던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侹)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그 결과 전쟁은 일단 중지되고 몽골은 이듬해인 1232년 음력 1월 군대를 철수하였는데 몽골 사료에는 이때 전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명을 두었다고 전한다.

고려는 비록 몽골과 강화를 하였으나 이는 고려의 본의가 아니었고 또 앞으로 몽골의 태도 여하를 몰라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결정하고,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강도(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각오를 굳게 다졌다. 이는 몽골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리타는 7개월 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서경의 홍복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을 공격한 다음 한강을 넘어 남쪽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해전에 약한 몽골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하여 처인성(處仁城)을 공격하다가 살리타는 고려의 김윤후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대장을 잃은 몽골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불타 없어졌다. 한편 몽골의 철수에 기세를 올린 최우는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가병(家兵) 3천을 주어 앞서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하여 가족을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1235년(고종 22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따로 당올태(唐兀台)에게 대군을 주어 다시 고려를 치게 하였다. 몽골은 개주(介州)·온수(溫水)·죽주(竹州)·대흥(大興)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다.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도 이때에 파괴되었다. 이같이 몽골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화도만은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강화도에 웅거하여 방위에 힘쓰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팔만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화도에서는 백성에게 미치는 피해를 우려하여 1238년(고종 25년) 겨울 김보정(金寶鼎) 등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였고, 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독촉으로 입조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佺)을 왕제(王弟)라 칭하여 대신 몽골에 보내고 1241년(고종 28년)에는 신안공의 종형(從兄) 영녕공 준(永寧公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귀위크 칸(貴由)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며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몽골은 정종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한때 철군하였으나, 몽케 칸(헌종)이 즉위하게 되자 1251년(고종 38년) 예케(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동주(東州)·춘주(春州)·양근(楊根)·양주(襄州)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이때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그러나 몽케 칸(원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고,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그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과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돌이켰는데, 이때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이듬해 몽골의 몽케 칸(원 헌종)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군을 보내,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화도를 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사이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257년 5월이었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했다. 1257년 10월에 몽골군은 선철군 후입조의 설득에 따라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의는 그런 것 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전횡을 부렸다. 결국 다음해 최의는 김준에게 살해당한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약속했던 고려 태자가 오지 않자, 김준이 정권을 잡은 지 한 달 만에 몽골군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앞세워 제9차 침입을 개시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도 몽골군에 대한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1259년 3월, 고려는 여러 차례 몽골군과의 전투 끝에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어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하지만 출륙(개경 환도)는 계속 지연되었다. 1259년 음력 6월 고종이 죽었고, 쿠빌라이 칸이 되는 쿠빌라이를 만나고 온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는데,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무신 집권자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심지어 김준을 살해하고 새 집권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강화를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창을 임시 즉위시키니 이것이 영종(후의 시호)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몽골의 압력으로 11월 자리에서 물러나고, 임연 역시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여 등창 때문에 죽는다. 임유무 역시 출륙을 반대하지만 그가 처형되면서 1270년, 무신정권은 끝이 나고 고려는 38년만에 환도 하게 된다. 이후 카다안의 침입 같은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쟁은 종결이 나게 되었다.

전쟁이 고려 영토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고려는 엄청난 인명손실과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다만 세계를 제패한 몽골군에 대한 40여 년 간의 저항은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었던 완강한 것으로서 몽골군도 누적결산을 해본 결과 큰 피해를 입었다. 당장 제3차 침입 이후에는 고려 전역이 쑥대밭이 되는 통에 침략군인 몽골군도 현지 징발이 매우 힘들어지는 사태까지 놓이는 일이 흔해서 본국에서 보급을 기다리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전쟁을 하면 할수록 손해만 발생하였다. 덤으로 완강히 버티는 산성 등을 함락할 때 상당한 인명피해까지 났으므로 몽골 입장에서도 힘만 빠지는 전쟁의 수렁이었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은 고려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막대한 인명·재산·문화재의 피해를 입혔다. 몽골은 끈질기게 고려왕의 입조·출륙을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등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다가, 1258년(고종 45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여 몽골에 대한 강화의 기운이 생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1259년(고종 46년) 음력 3월 박희실(朴希實)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자랄타이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화도의 성을 헐게 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간의 싸움 끝에 드디어 고려는 조건부 항복하였다. 그해 음력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는데, 그는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도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후 강화도에서는 무신간의 알력이 생겨 한때 왕이 폐위되었으나 다시 복위하였고, 몽골의 초청을 받고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하여 개경에 환도하니 이로부터 고려는 몽골의 간섭 하에 들어갔다. 이는 강화도로 천도한지 39년 만의 일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윤희병, 『고려의 북방정책: 여진정벌 재평가와 윤관구성 고찰을 중심으로』(세계문화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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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전쟁과 역사 2, 거란 여진과의 전쟁』, (혜안, 2004)
  • 윤용혁, 『여몽전쟁과 강화도성 연구』(혜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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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동인,「고려의 동북지방경역에 관한 연구-특히 윤관의 9성설치범위를 중심으로-」(『영동문화』1, 관동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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