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바보 溫達은 정말 바보였을까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먼저 「온달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사실적인 부분부터 하나씩 확인해보자. 「온달전」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의하면 고구려양원왕(陽原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왕에게 아뢰어 신라에 의해 잃어버린 한수 이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출정할 것을 청원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고,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면서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온달전」에는 그의 관이 움직이지 않자 부인인 평원왕(平原王)의 공주가 내려와 간절하게 호소하여 관이 움직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지막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설화라고 하더라도,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영토를 되찾으려고 출정하였다가 신라와의 전투에서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한 고구려 장군의 존재는 역사상 실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603년(영양왕 14)에 장군 고승(高勝)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 왕이 거느린 대군의 반격으로 후퇴한 기사가 전하고 있으며, 608년에는 고구려 장군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8천명을 포로로 잡고, 신라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시킨 기사가 전하고 있다. 이에 고승을 온달과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적어도 이 시기에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는 정황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온달의 행적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그러면 「온달전」의 내용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온달은 3월 3일 행해지는 춘계 수렵행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여 평원왕의 눈길을 끌었다. 이어서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어 요동을 침략하자, 평원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판에서 적을 맞아 싸웠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적병 수십 명의 목을 베자 군사들이 기세등등하여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에 제일의 공을 세운 온달에게 평원왕이 대형(大兄)의 벼슬을 내리고, 정식으로 부마(駙馬)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였다고 한다.
「온달전」의 기록에서 가장 구체적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바로 북주무제의 침입 기사이다. 북주가 북제(北齊)를 병합한 시기가 577년이므로, 그 이후에 북주가 요동으로 침공할 수 있는데, 무제의 생몰년을 고려하면 577년으로 범위가 좁혀진다. 그리고 577년에는 고구려가 북주와 외교관계를 맺게 되는데, 아마도 요동 지역에서 한차례 군사적 충돌을 치루고 양국이 화평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북주와의 요동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온달전」의 기록대로라면 온달이 대형 벼슬을 받은 시기가 577년이라고 거의 단정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고구려 장군과 북주와의 요동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평원왕의 총애를 받게 되는 장군의 존재가 실재할 가능성이 높다면, 이 두 사건의 주인공을 동일 인물인 온달로 상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시 고구려가 처하였던 국제 정세를 보면 이러한 온달의 행적은 충분히 있음직하다고 여겨진다. 북쪽으로는 북제·북주·수 등의 북중국 세력이 6세기 중반 이후 요해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며 삼국 간 항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고구려의 대외 정책은 요동 지역에서 이제까지의 세력권을 유지하는 한편, 남쪽으로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온달 설화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행적을 갖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공식적인 행적을 보이기 이전의 온달의 존재, 즉 온달과 평강 공주가 결혼하는 과정을 기술한 내용은 매우 설화적이다. 특히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던 가난하고 미천한 온달과 한 나라의 가장 존귀한 신분인 평강 공주가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과연 결혼을 할 수 있느냐 여부가 「온달전」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감이 가장 큰 부분이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까?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온달은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용모가 우습게 생겼고 옷차림이 남루하여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원왕의 딸이 어려서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고 희롱하였다.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上部)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온달과의 혼인을 주장하며 궁을 나와 온달과 결혼하였다. 공주는 황금 팔찌를 팔아 집과 전답·노비·우마 등을 사들여 살림살이를 갖추고 온달은 열심히 무예를 닦고 익혔다.
그러면 위 이야기처럼 당시 고구려 사회 현실에서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인 온달이 과연 공주라는 높은 신분층과 혼인을 하고 또 무공을 세워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온달이 실존하였던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가 평원왕의 부마라는 사실도 허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의 신분제에 비추어 볼 때, 공주와 결혼한 온달을 위 설화처럼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온달을 명문 귀족 출신으로 보기도 어렵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위 설화의 핵심은 온달과 평강 공주와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결혼에 있는데, 온달이 명문 출신이면 이와 같은 내용의 설화가 만들어질 리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달은 평민 출신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평원왕의 부마가 되는 것이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만큼 그의 출신이 낮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왕실과의 통혼권에서 벗어나 있던 하급 귀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이 점은 그가 북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정식으로 부마로 인정받은 뒤에야 겨우 7위에 해당하는 대형(大兄) 벼슬에 오른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말기에 명문 귀족 출신인 연개소문이나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직책을 계승하여 최고위 관직에 오른 사실과 비교하면 확실히 그 차별성이 드러난다.
좀 더 추측을 해 보자면, 온달의 가문은 온달 당대에는 하급 귀족에 속하는 가문이었지만, 그의 몇 대 선조는 여기에도 속하지 못한 일반 평민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설화에서 온달을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그의 가문의 내력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온달이 하급 귀족 출신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평강 공주와의 파격적인 혼인을 할 수 있었을까? 설화에는 온달이 공주와 혼인한 후 무훈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뛰어난 무예와 북주와의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군공이 이유가 되어 공주와의 결혼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마도 당시 귀족들이 수긍할 만한 뛰어난 공을 세움으로써 파격적인 결혼을 약속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급 귀족 출신인 온달로서는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상부(上部)고씨(高氏) 같은 유력한 경쟁 상대가 나타났을 것이다.
온달 설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찾아본 결과 온달은 실존 인물이며, 그가 평원왕의 공주와 결혼한 것도 사실일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평강 공주의 결혼이 파격적일 만큼 온달의 신분적 지위가 하급 귀족이었을 가능성도 상정하였다. 그렇다면 하급 귀족의 파격적인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적 환경은 무엇이었을까?
설화 속에 그려진 바보 온달의 출신과 그의 성장 과정을 통해 이 설화 속에 당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계층의 모습상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설화상의 온달과 같이 밥을 빌어먹어야 했던 가난한 평민들의 존재가 있었을 것이고, 온달이 공주와 결혼하여 황금 팔찌를 팔아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새로 부를 축적한 계층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공을 통하여 관직을 얻어 하급 귀족으로 진출한 계층 등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사회 변동 속에서 나타난 여러 형태의 인간상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한 설화로는 또 백제무왕과 관련된 서동 설화를 들 수 있다. 마를 캐어 내다 팔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서동은 신라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 공주를 사모하여 거짓 노래를 퍼뜨리고, 이 때문에 궁에서 쫓겨난 공주와 결혼한다. 공주가 궁에서 갖고 나온 황금을 팔아 살림살이를 마련코자 하였을 때, 서동은 비로소 집 곁에 쌓아 둔 돌덩이가 황금임을 알게 된다. 공주는 “이것만 있으면 한평생을 부자로 살 수 있다.”고 황금의 가치를 깨우쳐 준다. 서동은 많은 황금을 진평왕에게 보내어 신임을 얻었고, 뒤에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서동 설화도 온달 설화와 그 줄거리가 거의 흡사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화가 형성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은 어떠하였을까?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시기에 삼국 사회에는 커다란 사회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였고, 아울러 상업과 수공업도 진전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분화가 촉진되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계층도 나타난 반면 상당한 토지와 부를 소유한 부호 농민층도 등장하였다. 이들의 부의 축적 과정은 조상 대대로 권세를 누려 왔던 귀족 세력과는 달랐다. 그래서 온달 설화에서는 온달이나 서동이 일단 공주가 궁을 나오면서 몸에 지니고 나온 황금 때문에 부자가 된 것으로 묘사하였다. 황금을 획득한 온달과 서동을 통하여 6세기를 전후하여 새로이 부를 축적하며 성장하는 부민층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온달이 무인으로 출신하여 벼슬길에 올랐다는 내용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새로 성장하는 부민층이 단지 경제적인 부의 축적으로만 만족하였을 리 없다. 당시 사회에서 쉽지는 않았겠지만 한편으로 정치적 진출과 성장도 꾀해 나갔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경제 기반이 곧 정치적 진출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관료로서 국가 지배세력 내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관료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어야만 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풍속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여, 미천한 집안까지도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르고, 자제들이 결혼을 할 때까지 그 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이 기록처럼 고구려의 경당은 일반 평민 자제들이 활쏘기 등의 무예를 닦고, 독서를 통해 유교적 소양을 기르는 곳이었다. 이러한 경당에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의당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민층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경당에서 기본적인 소양을 쌓고, 위 「온달전」의 내용처럼 수렵 행사나 대외 전쟁을 통해 그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여 관료로서의 진출을 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온달이 왕의 사위가 되었다거나 또는 대형의 벼슬에 올랐다는 전승은 적어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열려 있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온달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정한 후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계립령은 지금 충청북도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옛길인 하늘재이며, 죽령은 단양과 풍기를 잇는 오늘날의 죽령으로 비정된다. 이 일대는 삼국간에 쟁패가 치열하였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런데 정작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 지금 서울 광장동의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영월군 영춘면의 온달 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아차산성 설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주 충돌 지역이 한강 하류 일대임을 근거로 하고 있다. 단 이름이 아차성(阿且城)이 된 것은 조선태조의 이름 ‘단(旦)’을 피하기 위하여 바꾼 결과라고 본다. 하지만 현재 좀 더 지지를 얻고 있는 견해는 아단성=온달 산성 설이다. 이곳의 고구려 때 지명이 을아단(乙阿旦)이었다는 점이나, 계립령 및 죽령과 가깝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 이 지역에 온달 전승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물론 지금 남아 있는 온달 산성 자체는 신라가 소백산맥 북방으로 진출하면서 쌓은 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