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윤

한자 李範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6년 5월 3일
활동 시기/일시 1902년
활동 시기/일시 1903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04년
활동 시기/일시 1905년 초
활동 시기/일시 1906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몰년 시기/일시 1940년 10월 20일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
거주|이주지 중국 간도
거주|이주지 중국 훈춘
거주|이주지 러시아 연해주 연추
거주|이주지 러시아 시베리아
거주|이주지 중국 만주
활동지 중국 간도
활동지 중국 훈춘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연추
활동지 러시아 시베리아
활동지 중국 만주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독립군단 총재|북로군정서 총재
정의

개항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항일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이범윤(李範允)[1856~1940]은 1903년 대한제국의 간도관리사로 제수되어 간도 지역 한인의 권익 옹호와 보호에 진력하였다. 1905년 11월 초 망명하여 연해주 연추에 정착, 최재형과 연합하여 연해주 의병을 편성하는 등 연해주와 간도를 중심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하였다.

가계

아버지는 훈련대장 이경하이고, 형은 이범진이다.

활동 사항

이범윤은 1856년 5월 3일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했다. 1902년 간도시찰사로 출발하여 1903년 7월 간도관리사에 임명되어 한인 권익 옹호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반발하자 함경도에서 산포수를 중심으로 자신이 초모(招募)한 민군인 충의대를 이끌고 러시아군과 함께 항일전을 벌였다. 훗날 휘하에 있던 허찬, 오칠성, 정남규, 최군칠 등은 연해주 의병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충의군 역시 연해주 의병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범윤 휘하의 의병은 관리병(管理兵)이라고 불리었다. 이범윤연해주 활동 당시 관리사와 산포대장(山砲隊長) 직함을 같이 사용하였다.

1905년 초 러시아로 망명을 단행하여 전원 총기로 무장한 3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훈춘 부근에 머물다 1906년 청의 퇴각 요구로 연해주 연추로 이동하여 정착하였다. 연추에서 최재형과 연합하여 연해주 의병을 편성하였다. 안중근, 전덕제, 엄인섭 등과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쳐, 갑산, 혜산진, 무산, 회령 등 국경 일대에서 일제와 전투를 벌였다. 1908년 3월 이위종이 가져온 1만 루블에 힘입어 창의회를 창설하였다. 창의회는 1910년 5월 십삼도의군 편성 때 근간이 되는 창의군으로 발전, 계승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유인석 등과 성명회를 조직하여 병합 반대와 무장투쟁을 호소하였다.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권업회 총재로 추대되었다. 1919년 4월 만주 연길현 명월구에 근거를 둔 의군부를 조직하고 총재에 취임했다. 한편으론 상해 임시 정부에서 평정관(評定官)으로 활동을 하였다. 1921년 독립운동의 통합 여론에 따라 ‘대한독립군단’ 창설에 참여하였다. 서일(徐一)이 자결한 후 대한독립군단과 북로군정서의 총재로 추대받았다. 1922년 대한독립군단이 큰 타격을 받자, 김좌진, 김혁 등과 힘을 합쳐 신민부를 조직하고 참의원장이 되었다. 성동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무관 양성에 힘썼다.

그 후 만주, 시베리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40년 10월 20일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범윤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윤병석, 『해외 동포의 원류-한인 고려인 조선족의 민족 운동』(집문당, 2006)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list.asp)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