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한자 元世勳
영문 Won Seho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7년 7월 10일
수학 시기/일시 1905년
수학 시기/일시 1906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11년
활동 시기/일시 1915년
활동 시기/일시 1918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18년 말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20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9월
활동 시기/일시 1922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22년 9월
활동 시기/일시 1923년 초
활동 시기/일시 1923년 8월
활동 시기/일시 1925년 초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27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27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8월 1일
몰년 시기/일시 1959년 12월 25일
추모 시기/일시 1989년
출생지 함경남도 정평군
학교|수학지 서울특별시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활동지 중국 상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국회의원
정의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과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원세훈(元世勳)[1887~1959]은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전로한족회·철혈광복단·대한국민의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대한국민의회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의 통합 문제를 교섭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의 동시 해산과 신국회 조직을 합의하고, 대한국민의회를 해산하였다. 이후 합의와 다르게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각원의 개조만을 행하자 이에 격분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반대 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1923년 초 국민대표회에 참석하여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총국[코르뷰로]과 민족혁명당 결성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가계

원세훈의 아호는 춘곡(春谷)이고, 아버지는 원도경(元道京)이다.

활동 사항

원세훈은 1887년 함경남도 정평에서 태어났다.

1906년에 상경하여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인 1911년 3월 비밀 결사 독립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복역하였다. 1911년 중국 간도로 망명하여 모록의숙을 세우고 교사로 활동하였다. 원세훈은 1915년 러시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여 10월에 대동학교를 설립하고 3년 동안 교장으로 일했다. 1918년 6월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임되었고, 1918년 말 러시아 연해주에서 조직된 전투적인 비밀 결사인 철혈광복단에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통합을 위한 대한국민의회 교섭위원으로 선정되어 5월에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인사들을 만나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의 통합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러시아 지역에 둘 것을 제안하였다. 1919년 7월 중국 상해의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장건상, 손정도, 김철 등과 함께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의 동시 해산에 대해 안창호와 합의한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파견원 현순, 김성겸과 함께 8월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19년 8월 30일대한국민의회 총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의 동시 해산과 함께 한성정부를 유일한 법통 정부로 세우자는 제안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이고 대한국민의회의 해산을 선포하였다. 1919년 10월 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문창범과 함께 중국 상해로 왔지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해산되지 않고 각원의 개조만 진행된 것에 크게 반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승인 개조 논쟁이 촉발되었고, 이후 원세훈은 중국 상해에 머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반대 운동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대한국민의회를 재건하고 부의장 겸 내무부장이 되었고, 9월에는 대한국민의회 지도자들이 사회주의로의 방향 전환을 표명한 선언문에 문창범, 김하석, 김기룡, 오창환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1921년 2월 중국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5월에는 20명으로 구성된 국민대표회 기성회에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태평양회의[워싱턴회의]를 지원하기 위해서 조직한 태평양외교후원회와 외교연구회에 안창호, 여운형 등 국민대표회를 추진하는 인사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2년 7월 중국 상해에서 시국에 관련된 편견과 분규를 없애고 각자의 주장과 이익을 충분히 토의하여 최선의 방책을 실현하자는 목적으로 여운형이 제창한 시사책진회에 가입하였다.

원세훈은 1922년 9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중한호조사 이사회에서 편집인 겸 간사로 선출되었으며, 1923년 초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 참석하여 창조파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 이후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1923년 8월 김규식, 박용만, 신숙, 윤해 등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9월 6일부터 고려총국[코르뷰로] 위원들과 민족혁명당 결성 문제 등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1923년 10월 10일 김규식, 신숙, 이청천, 윤해와 함께 국민위원회 대표로 「한국독립당의 정강 및 프로그램」이라는 문서를 채택하기로 합의하였다. 1924년 3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중국 북경으로 가서 7월경에 창조파 주도로 한교동지회를 조직하였다. 1925년 3월 한교동지회가 발행한 『도보(導報)』의 발행인으로 창간사를 작성했다. 1926년 10월 중국 북경에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 위원이 되었다. 1927년 2월에는 중국 상해에서 김구가 주도하여 조직한 한국노병회 통상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원세훈은 1927년 체포된 신채호의 구출을 위해 활동하던 중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넘겨졌다. 1928년 8월 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이후엔 국내에 거주하면서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총무로 선임되었고, 1946년 7월 우익 진영 대표로 좌우 합작 회담에 참가했다.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여 정치위원이 되었고,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1950년 5월 국회 의원 선거에서 서울 중구 갑구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원세훈은 1959년 12월 25일 국제 간첩 혐의로 북한에서 처형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9년 대한민국 정부는 원세훈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조국 광복만을 위해 살다 간 민족의 거인』(범우사, 1998)
  • 『한국 민족운동과 민족 문제』(국학자료원, 1999)
  •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2003)
  • 손염홍, 「1910~1920년대 중반 북경 한인 사회와 민족 운동의 특징」(『한국근현대사연구』30, 한국근현대사학회, 2004)
  • 임경석, 「코민테른 고려총국의 기능 정지에 관한 연구」(『대동문화연구』71,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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