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러시아 이르쿠츠크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1년 5월
해체 시기/일시 1922년 12월
정의

1921년 5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주에서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 주도로 창립된 고려공산당.

개설

1921년 5월 4일부터 5월 15일까지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의 주도로 한국 최초의 전국적 공산당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창립 대회가 개최되었다.

변천

1921년 5월 4일부터 15일까지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한 창립 대회가 개최되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건설되었다.

한국 국내, 중국, 만주, 극동 공화국, 러시아 각지에서 83명의 대표들이 창립 대회를 위해 모였지만, 러시아에 소재하는 공산 단체 대표자가 전체의 90%를 차지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조직 기반이 러시아 소재 한인 공산 단체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 이외 지역에서 참석한 대표자 중 확인 가능한 인물로는 중국 북경 대표 장건상, 중국 상해 대표 안병찬과 김만겸, 한국 국내 대표 서초 등이다. 또한 중국 하얼빈 대표로는 신민회와 한인사회당에 참여했던 유동열이 참여하였다. 창립 대회는 대회 의장을 이성이 맡았고, 창립 대회 의장단에 안병찬, 김철훈, 최고려, 이성, 김동한을 선출하였으며, 서기로는 한명세, 김아파나시, 최태열 외 1명을 선임한 후 진행되었다.

창립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이 모두 전로한인공산당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1921년 3월 러시아 치타의 극동국 한인부가 소집한 당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블라고베셴스크에 집결했던 대표자들로 블라고베셴스크 당 대회가 무산된 후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시로 이르쿠츠크 당 대회에 강제로 출석한 경우였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창립 대회는 시작부터 최고려의 자격 문제와 대한의용군 내 공산주의 세포 대표자 15명의 자격 문제로 갈등이 격화되었다. 결국 대회 다수파는 대한의용군을 대표하는 김아파나시, 박군팔, 이재형 등 5명을 대회에서 축출하고, 64명을 정식 대표자로 인정하면서 내부 갈등을 정리하였다. 그 후에도 장기영이 추가로 대회장에서 추방되었지만, 창립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한인사회당의 지도자 박진순, 김립, 이한영, 김하구, 김규면을 비혁명 분자로 규탄하는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한인 민족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상해에서 조직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경쟁하였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당 통합 대회가 열렸으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1922년 12월 코민테른 조선 문제 위원회의 ‘12월 결정서’에 따라 대표성이 부정되어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함께 해산되었다. 대신 ‘고려총국’이 조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창립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이성, 김만겸, 김철훈, 김하석, 남만춘, 서초, 안병찬, 유동열, 장건상, 최고려, 한명세가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와 대한국민의회 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이외 지역에서 새롭게 합류한 인물들로 추가된 구성이었다. 중앙위원회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한국 지부의 역할을 겸했으며, 중앙위원회 내에 선전 선동 출판부, 조직 지도부, 정보 조사 통계부의 3개 부서를 두기로 하였다. 지역 조직의 경우에는 러시아 내의 조직과 러시아 이외 지역의 구성이 달랐다. 러시아 내의 지역 조직도 지역적 특성에 맞게 차이를 두었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협의가 수월한 러시아 시베리아와 중앙 지역은 이 지역의 한인들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고려선전중앙의회’를 설치하였고, 시베리아 각 지방에는 ‘고려선전선동부’를 설치하여 지방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내의 한인 공산 단체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지방 기관이자 러시아 공산당 지방당의 한인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러시아 내의 다른 지역인 극동공화국 내의 공산 단체들은 일본과의 외교 문제를 고려하여 반합법 활동을 전개하였고, 러시아 연해주의 단체들은 비합법 활동에 맞게 소수의 인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는 6개의 지방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한국 내에 3개, 중국, 만주, 일본에 각각 1개씩의 지방위원회를 두기로 하였다. 중국 지방위원회는 상해에, 만주 지방위원회는 하얼빈에 설치되었지만, 한국 국내에 설치하기로 한 3개의 지방위원회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교육 기관으로 전로한인공산당의 정치학교 사업을 계승하여 당중앙정치학교를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1921년 6월 중순 러시아 공산당 이르쿠츠크현 당학교의 부설 형태로 설립하였다. 개교 당시 46명이었던 학생 수는 설립 3개월 후인 9월에 120명으로까지 늘었다.

이외에도 재상해 한국공산당과 짝을 이뤘던 고려공산청년회 상해회도 창립 대회 당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영향력 아래에 포함되었다. 창립 대회의 결정에 따라 1921년 7월 국제공산청년회 제2차 대회에 참석했던 조훈의 주도로 1921년 8월 중국 북경을 근거지로 고려공산청년회중앙총국이 건설되었다. 고려공산청년회중앙총국 위원으로는 조훈, 이괄, 김호반, 박헌영, 남공선이 선임되었고, 박헌영이 책임 비서를 맡았다.

의의와 평가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조직한 정당으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함께 초기 한인 사회주의 운동의 두 축 중 하나였다.

참고문헌
  •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2003)
  • 임경석, 「1922년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의 결렬」(『한국사학보』27, 고려사학회, 2007)
  • 임경석, 「코민테른의 1922년 12월 결정서 채택에 참여한 조선인들을 중심으로」(『사림』53, 수선사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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