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羅鮮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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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개설 시기/일시 | 1875년 8월(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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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882년 |
성격 | 한인 마을 |
1875년 러시아 우수리주에 형성된 재러 한인의 정착 마을.
러시아 남부 우수리주 나선동은 한국에서 넘어온 주민들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 아니라 러시아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새롭게 개척한 마을이다. 나선동은 1875년 8월 지신허에 거주하고 있었던 안형국, 김구삼 등이 러시아 관청의 허가를 얻어 지신허로부터 30호가 이주해 만든 마을이다. 나선동의 러시아 명칭은 샤벨로브카이다. 나선동은 토질이 비옥하여 이주한지 수 년이 넘지 않아 70여 호가 사는 대부락이 되었다. 실제로 1878년 나선동에는 417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2년이 지난 뒤인 1880년에는 153가구 1,420명이 거주하게 되었다. 1882년에는 270여 가구 2,600여 명이 사는 큰 마을로 성장했다. 나선동에는 벌포라는 이름의 마을을 지키는 자경단이 있었다. 이런 자경단이 설치된 것은 홍후즈들의 약탈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882년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청나라는 러시아가 나선동이 속해 있는 흑정자(黑頂子) 일대를 불법 점령하고 있다고 항의하며 반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요구에 러시아 당국은 나선동에 사는 주민들에게 러시아령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하며 강제로 주민들을 쫓아내고 마을을 파괴했다. 러시아의 강제적인 철거로 인해 나선동 주민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 나선동이 철거되자 주민들 가운데 몇몇은 조선으로 돌아갔으나 김몽렬, 김풍갑 같은 이들은 러시아 연해주 도비허로 다시 이주하였다.
나선동의 면적은 남북 4㎞이고 아무르강과 인접하고 넓은 평원를 가지고 있어서 농사 짓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남쪽으로는 경흥까지 8㎞ , 서쪽으로는 경원까지 40㎞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훈춘과 30㎞ 떨어져 있고 동으로는 대양과 24㎞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부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