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문』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일본 도쿄도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창간 시기/일시 1946년 8월 15일
성격 신문
관련 인물 김천해|김두용|김계담
발행인 김계담
총호수 3호
정의

1946년 일본 도쿄도에서 재일 한인이 발행한 한글 신문.

개설

해방 직후 재일 한인에 의해 일본 도쿄에서 간행된 『민중신문』과 일본 오사카에서 간행된 『대중신문』이 합병하여 1946년 8월 15일에 탄생한 신문이 『우리신문』이다. 두 신문이 『우리신문』으로 합병된 이유는 같은 내용의 뉴스를 게재하고 있었다는 점과 경영 기반의 강화 및 사업 확대와 같은 경제적 이유, 그리고 좌익 계열의 결합이라는 정치적 이유도 배경에 있었다.

형태

『우리신문』은 정가가 50전이었고, 한 달 정기 구독료는 3엔이었다. 5일에 한 번씩 간행되었다.

구성/내용

3호까지 발행된 『우리신문』에는 발행 시기의 특성상 해방 1주년을 기념하는 기사들이 돋보인다. 또한 당시의 한반도 정세와 일본의 정치적 상황, 재일 한인의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특히 창간호에 실린 윤권의 「사명은 중대」는 재일 한인 사회에서 『우리신문』이 갖는 중대한 역활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은 기관지 역활을 한 『우리신문』의 창간을 통해 재일 한인의 지도와 계몽 활동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변천과 현황

『우리신문』의 대표는 민중신문사 대표였던 김천해(金天海)가 맡았으며, 주필은 재일본조선인연맹 중앙위원 및 일본 공산당 조선인부 부장인 김두용(金斗鎔), 편집 겸 발행인은 김계담(金桂淡)이었다. 1946년 9월 1일 『우리신문』은 창간 3호부터 『해방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간행하였다. 1949년 9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명령으로 재일본조선인연맹이 해산되면서 『해방신문』도 1950년 8월 2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해방신문』은 1952년 5월 20일에 복간하여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에서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결성으로의 노선 전환을 뒷받침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결성 후 1957년 1월 1일부터 제호를 『조선민보』로 바꾸고, 1961년 1월 1일부터는 현재의 『조선신보』가 되었다.

참고문헌
  • 『朝鮮問題資料叢書:解放後の在日朝鮮人運動』3(アジア問題研究所, 1984)
  • 小林聡明, 『在日朝鮮人のメディア空間: GHQ占領期における新聞発行とそのダイナミズム』(風響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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