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수

원어 항목명 金達寿
한자 金達壽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9년
몰년 시기/일시 1997년 5월 24일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원군
원어 항목명 金達寿
성격 작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부터 소설가, 고대사 연구자, 평론가, 저널리스트, 편집인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한 재일 한인 1세대 작가.

활동 사항

김달수는 1919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나 5세가 되던 해에 부모와 큰형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할머니, 작은형과 함께 살았다. 그러던 와중에 함께 지내던 작은형이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거주하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0세가 되던 해에 일본에서 살던 큰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김달수는 낫토 장사, 넝마주이, 공중목욕탕 화부(火夫) 등 궂은일을 하며 일본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일본으로 가기 전에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였던 김달수는 일본에서도 가난으로 인해 소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어 소학교를 퇴학해야 하였다. 그러나 빈곤한 가운데서도 문학에 뜻을 두었고, 1939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였다.

김달수는 1970년 즈음부터는 일본과 한국의 고대사로 관심을 옮겨 『일본 속의 조선문화[日本の中の朝鮮文化]』[1970~1991] 시리즈 전 12권을 발행할 정도로 폭넓고 다양한 주제로 고대사 및 한일관계사를 검증하고자 하였다. 역사학계의 비편과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김달수는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던 귀화인(帰化人)이라는 용어를 도래인(渡来人)이라는 용어로 수정하는데 크게 영향력을 미쳤다. 1975년 2월 강재언, 이진희 등과 함께 『계간 삼천리(季刊三千里)』를 창간하여 재일 한인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한국 정세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책임편집은 역사가 이진희가 맡았고 문학자 김석범, 평론가 윤학준, 역사가 강재언, 박경식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일본인 필자도 다수 참여하였다. 『계간 삼천리』는 1987년 5월까지 총 50호가 발간되었고, 1989년 8월부터 후속지 『계간 청구(季刊靑丘)』로 이어져 1996년 5월까지 총 25호가 발행되었다. 소설가, 고대사 연구자, 평론가, 저널리스트, 편집인 등 다양한 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인 김달수는 제1세대 재일 한인 문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김달수는 1997년 5월 24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달수는 1940년 데뷔작 「위치(位置)」[『예술가』 8월호]를 발표하였고, 대학 동인지와 잡지 『문예수도(文芸首都)』를 중심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잡지 『문예수도』에는 재일 한인 작가 김사량김태생, 김석범 등도 활약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인 1942년 가나가와 일일신문사[神奈川日日新聞社] 사회부 기자로 일하였으나 1944년 퇴사하였다. 해방 후 김달수는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은 펼쳐 나갔는데 1946년 4월 『민주조선(民主朝鮮)』을 창간하고 장편 소설 「후예의 거리(後裔の街)」를 연재하였다. 이후 장편 『현해탄(玄海灘)』[1954], 『태백산맥(太白山脈)』[1969]과 중편 『박달의 재판[朴達の裁判]』[1959] 등을 발표하며 재일 한인 문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달수는 1957년 평화문화상과 1974년 청구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해탄』은 1953년 하반기 제30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 선정되었고, 1955년 신초문학상[新潮文学賞] 후보작에도 올랐다. 『박달의 재판』 역시 1958년 하반기 제40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 선정되는 등 김달수의 작품은 일본 문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참고문헌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崔孝先, 『海峡に立つ人: 金達寿の文学と生涯』(批評社, 1998)
  • 『金達寿ルネサンス: 文学·歴史·民族』(解放出版社,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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