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New York and New Jersey Metropolitan Area Koreatown |
---|---|
영문 | New York and New Jersey Metropolitan Area Koreatow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세계)/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미국 뉴욕주 뉴저지주 코네티컷주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New York and New Jersey Metropolitan Area Koreatown |
---|
1920년대부터 미국 동부 뉴욕 및 뉴저지 대도시권에 형성된 한인 주거지와 상업지구.
뉴욕/뉴저지 대도시권[New York and New Jersey Metropolitan Area]은 미국의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Connecticut) 3개 주에 속한 약 30개 카운티를 지칭한다. 이들 지역의 맨해튼(Manhattan), 플러싱(Flushing), 퀸스(Queens), 브루클린(Brooklyn), 롱아일랜드(Long Island) 등에 한인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의 한인타운은 캘리포니아 지역 다음으로 미국에서는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 1965년에 개정된 미국의 「이민 및 민족법」은 뉴욕과 뉴저지 대도시권에 한인타운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80년까지 뉴욕/뉴저지 대도시권의 한인 인구는 약 3만 8000명에 불과하였으나 그 이후 크게 성장하였다. 2017년 아메리칸 커뮤니티 서베이(American Community Survey)[ACS]에 따르면, 약 23만 명의 한인이 뉴욕/뉴저지 대도시권에 집중되어 있다. 1965년 미국의 「이민 및 민족법」 개정 이후 이주가 본격화되었으며, 그 이후부터 2017년까지 꾸준한 한인 이민자의 유입으로 7배가량 증가하였다. 이처럼 이 지역에는 대규모의 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으며 한인의 유입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뉴욕/뉴저지 대도시권에 처음 한인이 정착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초창기에는 독립운동가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후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미국과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유대 관계가 증진하며 이곳에 자리를 잡은 한인 학생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뉴욕/뉴저지 대도시권의 한인타운 형성은 1965년의 「이민 및 민족법」 개정 이후 본격화되었다. 1960년대 컬럼비아대학교와 뉴욕대학교 등에 유학 온 학생들은 400명 정도였다. 학생들 이외의 한인들은 전문직 종사자, 사업가, 군인, 공무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컬럼비아대학교 주변에 있던 뉴욕 한인교회는 1960년 이전까지 이 지역 한인 사회의 핵심 교두보 기능을 하였다. 뉴욕 한인회는 1960년에 창립되었으며, 사무실은 맨해튼에 두었다. 오늘날에는 플러싱이 뉴욕/뉴저지 대도시권 한인 사회의 지리적 중심이지만, 1960년대 초반까지는 맨해튼이 그 역할을 맡았다. 뉴욕/뉴저지 대도시권에 형성된 한인타운은 주로 맨해튼, 플러싱, 베이사이드, 퀸스, 브롱크스(Bronx), 스태튼아일랜드(Staten Island) 지역 등에 산재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대도시권 주변의 교외 지역으로도 한인 주거지와 상권이 확대되고 있다.
맨해튼에서의 한인 사회 역사는 미국 동부 지역에서의 한인 이주 역사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일제 강점기인 1921년 뉴욕 한인교회와 북미주 한인유학생총회가 맨해튼에 설립되면서 한인들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당시 이곳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복 후 주뉴욕 총영사관이 설치되고 한인 동포들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뉴욕 한인회도 창립되었다. 상업의 중심지인 맨해튼에서 한인 사업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한국산 가발 수입업자를 중심으로 브로드웨이에 한인 상가가 집중하였으며, 이를 따라 1970년대 이민 물결 속에 한국 식당이 점차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맨해튼 32번가 한인타운이 형성되는 결과를 낳았다. 2019년 기준 맨해튼의 인구는 약 163만 명이고, 이 중 한인 인구는 2만 300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인 교회가 중심이었던 맨해튼 지역의 한인 사회는 차이나타운 인근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확장이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지역에 직업소개소가 입지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맨해튼에 한인 상가 지역이 두드러지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60년대 후반 한국산 가발의 인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미국 사회에 가발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가발 산업이 번창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맨해튼은 미국 전역에 가발을 공급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한인 가발 수입업자와 한인 도매상이 모여들면서 브로드웨이 29번가 주변에 한인 상가가 형성되었다.
이후 가발 산업이 사양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1970년대 초부터 한인들은 의류, 가방, 잡화, 귀금속 등의 부문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할렘 한인 상가와 한인 식당들이 집중한 맨해튼 32번가에 한인타운 등이 형성되며 맨해튼 지역의 한인 사회 규모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현재 맨해튼 지역에는 170여 개의 한인 관련 업소들이 들어서 있으나, 최근에는 지가가 상승하며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맨해튼은 1921년 북미 대한인유학생총회의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한인 단체의 지리적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1924년 뉴욕 한인교민단, 1950년 뉴욕 한인회, 1968년 뉴욕 한인영주민회, 1999년 맨해튼 한인회 등이 설립되었는데, 이들의 역할은 맨해튼과 뉴욕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표하는 것이며, 최근에는 한인들의 주류사회 진출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이밖에도 맨해튼 지역 한인들은 교회, 식당, 무역 산업, 예술 분야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플러싱은 뉴욕의 맨해튼에서 동쪽 방향으로 20㎞ 정도 떨어져 있는 교외의 주거 지역이다. 플러싱에서 맨해튼까지 자동차로 이동하면 1시간 정도 걸린다. 대도시 근접성과 대중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인구 유입이 증가하며 기업의 고용도 성장하는 지역이다.
퀸스에 속한 플러싱의 전체 인구는 약 17만 명이다. 이 중 한인 인구는 6만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는 뉴욕 한인 인구의 25% 정도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플러싱의 한인 규모는 뉴욕 지역의 한인 집중 거주 지역 중 가장 크며, 이에 따라 뉴욕 지역에서 가장 큰 한인 커뮤니티가 플러싱에 형성되었다.
이곳에 자리한 플러싱 메도스 코로나 파크(Flushing Meadows Corona Park)는 한인 이민사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6.25전쟁 중에 이 공원에서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려 유엔군의 참전이 결정되었다. 이후에 1964년부터 2년간 이 공원에서 뉴욕세계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박람회에 투입된 한국 참가 단원들이 단기 취업 비자로 입국해 퀸스와 플러싱, 큐가든(Kew Garden) 등에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였다. 뉴욕세계박람회 잔류 인원들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남아 있다가 이후 합법적인 신분을 얻어 플러싱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그후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지를 초청하는 방식의 연쇄 이주가 이루어져 한인 커뮤니티가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1982년 플러싱 메도스 코로나 파크에서는 뉴욕 한인청과상조회 주최로 추석맞이 민속 대축제가 개최되었고, 그 이후 이 축제는 매년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뉴욕 한인 최대 행사로 발돋움하였다.
플러싱에서 한인 상권은 노던 블러바드(Northern Boulevard)와 플러싱 162번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 플러싱 다운타운 일대에는 한인 식당, 주점, 카페 등이 몰려 있어 맨해튼 32번가 한인타운에 이어 ‘제2의 한인타운’으로 평가받고 있다.
플러싱의 한인 상권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한인 2세들이었다. 이들이 플러싱 한인타운에서 여러 가지 편의시설을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한 것이다. 플러싱 한인타운의 명물 중 하나로 ‘코리아 빌리지(Korea Village)’가 있다. 이 건물은 뉴욕 지역에서는 최초로 한인 자본으로 건설된 상가 건물이다. 계획 및 건축 과정에도 한인 건설업자가 참여하였다.
플러싱 이외의 퀸스카운티(Queens County) 지역에도 5만여 명의 한인 인구가 분포한다. 특히 우드사이드-서니사이드(Woodside-Sunnyside) 지역과 베이사이드-리틀넥(Bayside-Little Neck) 지역에 한인 밀집 거주 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우드사이드-서니사이드 지역에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한인이 이주해 왔으며, 맨해튼에 직장을 둔 사람이나 유학생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베이사이드-리틀넥 지역은 전통적으로 한인이 선호하는 주거 지역으로, 1980년대 경제력을 갖추고 주택을 소유한 한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브롱크스의 한인 사회는 브롱크스 한인노인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한인의 인구 규모는 2,000여 명으로 다른 곳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인 상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가발, 잡화, 의류, 신발 등의 분야에서 부를 축적하였다.
스태튼아일랜드에는 한인들이 1960년대 중반에 주로 이주하여 왔다. 이곳의 대형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 가족들이 정착하며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스태튼아일랜드 한인학교, 스태튼아일랜드 한인회, 스태튼아일랜드 한인세탁협회 등이 설립되었으며, 현재 7,000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뉴욕/뉴저지 대도시권 한인들의 정착 패턴을 보면, 이민 초기에는 뉴욕 시내의 퀸스를 중심으로 집중되었으나 이후 교외화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퀸스에 정착했던 한인 이민자들은 교외의 롱아일랜드와 버건카운티(Bergen County) 등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이후 뉴욕 지역으로 이주해 오는 한인들은 중심지에 자리 잡은 후 교외로 이주해 가지 않았으나 신규 진입자들은 곧바로 교외 지역에 정착하는 지리적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뉴욕/뉴저지 대도시권 지역에서 한인 공동체는 뉴저지의 버건카운티, 롱아일랜드의 나소 및 서퍽카운티, 뉴욕주 북부의 웨스트체스터 및 록랜드카운티와 같은 교외 지역으로 확장하여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교외 지역들은 대체로 초기 이주자들이 밀집했던 기존 중심지보다 더 나은 교육의 기회와 주거 환경이 갖추어진 곳이다. 예를 들어 버건카운티의 경우, 1990년대 중반부터 상업 지역과 함께 한인 주거 지역이 형성되며 많은 편의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이는 한인이 이 지역으로 활발하게 이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도 뉴욕/뉴저지 대도시권의 교외에 해당하는 포트리, 팰리세이즈 파크, 레오니아(Leonia) 등에도 한인 집중 주거 지역과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