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의 독립운동

원어 항목명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America
한자 美洲韓人-獨立運動
영문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Americ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세계)/개념 용어(개관)
지역 미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America
정의

1900년경부터 1945년까지 미주의 한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개한 활동 개관.

개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미주라고 하면 북미, 하와이, 멕시코, 쿠바 지역을 말하고, 일제가 국권을 침략하기 시작한 1900년경부터 1945년까지 미주의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 활동, 의열 투쟁, 군인 양성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대 미주의 독립운동

미주에 이민을 온 한인들은 처음에 자신의 나라가 있었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주권이 상실되어 일제의 식민지와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 후 미주 한인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1910년 ‘망국’이라는 통한을 당하고 말았다. 1909년 2월 북미의 공립협회(共立協會)하와이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통합하여 국민회(國民會)가 성립되었으며, 1910년 2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합류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라는 국외 한인의 대표기관이 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를 두면서 국외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서 ‘무형의 정부’의 역할을 하였다.

미주 지역의 3.1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泰和館)에서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과 자주민임을 선포하였다. 3월 9일 민족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소식을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현순(玄楯)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에게 전보로 알렸다. 독립선언의 소식이 전해진 이후 이승만(李承晩), 서재필(徐載弼), 정한경(鄭翰景)은 1919년 4월 14일부터 4월 16일까지 3일간 미국이 독립선언을 한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였다. 국내에서의 3.1독립선언이 마치 미국의 독립선언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승만 등 3명은 미국의 각 사업계, 교회계, 교육계, 신문 잡지계 등 대표될 만한 인사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회의를 개최하고, 미국 독립관까지 행진을 벌였다.

3.1운동 소식이 미주에 전해진 이후 미주 지역 한인을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국내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재정지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승만은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집정관 총재로 선출되었다는 문건을 받고, 1919년 8월 25일 집정관 총재 직권으로 대한민국 특파 구미주차위원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워싱턴 D.C.에서 출범시켰다.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독립을 위한 활동들이 폭풍같이 미주 한인 사회를 휩쓸고 나아갔다. 하와이와 북미에서는 한인합성협회·대한인국민회·교민단·동지회·흥사단·대조선독립단 등으로 나누어지기는 하였지만, 모든 한인 단체들이 독립운동에 온 정성과 노력을 다 바쳤다.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자금

미주의 한인들은 ‘금전으로 싸우는 것이 생명으로 싸우는 것만치 요긴하다’라고 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미주에서는 중국이나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게 물질적 지원을 충실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이었다. 미주 지역은 ‘한국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었다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였다.

3.1운동 이후 미주의 한인들은 독립 의연금, 공채금, 애국금, 혈성금, 국민 부담금, 독립금 등의 명목으로 중국·러시아 및 구미 각지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중일전쟁 이후 미주 한인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수십만 달러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그 가운데 많은 금액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사업을 위한 자금으로 제공되었다. 미주의 여성들도 먹을 것을 절약하여 푼푼히 모은 돈을 애국금으로 냈고, 고추장·간장·된장·묵·떡을 만들어 판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 등에 보냈다.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은 남성들의 책무만이 아니라, 여성들이 더 열성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데에 온 정열을 쏟았다.

구미위원부의 창설과 미주 지역 한인 사회의 변화

1910년대까지는 대한인국민회가 미주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였다.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기 전까지 미주뿐만 아니라 해외 한인을 대표하는 최고 기관이었다. 그렇지만 1919년 국내에서의 독립선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외부적 조건 변화가 있었다. 미주 지역 독립운동은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후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또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되면서 미주 한인들은 조국이 독립되고 새로운 국가가 건설될 것 같은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부라는 권위를 가진 임시정부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미주 한인의 대표기관이던 대한인국민회의 역할과 위상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 이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위상이 현격히 저하되면서 결국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중앙총회의 영향력에서 떨어져 나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주에서는 임시정부의 권위를 대행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가 독립운동의 구심력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미주의 모든 한인 단체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상황으로 재정리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한인국민회는 민간단체로서 위상이 떨어지면서 활동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이승만은 임시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를 통해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재편해 나갔으며,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것이 미주 독립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미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미주 지역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 관내 지방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과 상당히 비례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 미주 지역 독립운동도 역시 활기가 있었다. 반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이 침체되면, 미주의 독립운동도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만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주 독립운동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미주에서 오랜 역사를 가졌고 가장 강력한 조직을 가진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하여 동지회·흥사단, 그리고 1940년대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까지 대부분의 한인 단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미주 지역 독립운동도 크게 침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중반 미주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해야만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면서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1년 미주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면서, 독립운동은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것이 미주의 독립운동의 대세를 이루었다. 이승만주미외교위원부는 미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방향

미주 지역 독립운동은 초기에 독립전쟁 준비론에서 독립전쟁론으로 발전해 갔으며 외교적 방법론과 의열 투쟁, 그리고 직접적인 대일 항전을 주장하는 다양한 독립운동이 추진되었다.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은 친일적인 대한제국 외교 고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사살하는 의거를 벌였다.

그리고 박용만(朴容萬)은 1909년 헤이스팅스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을 양성하고자 하였고,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를 통해 원동에 독립군을 보내려고 하였다.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과 북가주 한인 재력가들은 1920년에 윌로우스에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하여 비행사를 양성하여 일본과의 공중전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한편 3.1독립 선언 이후 이승만은 워싱턴 D.C.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통해 미주와 유럽 지역 외교 및 재무 등을 관할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는 유럽과 미국 지역에서 외교 선전 활동을 담당하였지만, 주로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들에게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동정과 협조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구미위원부의 외교 선전 활동은 미국 내에 한국 독립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미국 의회를 움직여 미국 정부의 대한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는 전략이었다.

태평양전쟁 시기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

1941년 12월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미주의 한인들은 미국과 공동으로 대일 항쟁을 추진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에서는 1941년 12월 29일 로스앤젤레스 한인경위대를 창립하고, 다음해 4월 26일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정식 인가장을 받았다. 미주 한인들은 한인경위대를 ‘맹호군[Tiger Battalion]’이라고 불렀다. 한인경위대의 군복 어깨에 ‘호랑이’ 문양의 견장을 달았기 때문에, 별칭이 ‘맹호군’이 되었다. 호랑이 같은 기상과 용맹으로 여우 같은 일본을 박멸하자는 뜻에서 견장에 호랑이 문양을 넣었다. 직접 대일전에 참여할 수 없던 재미 한인들이 일제를 패망시키고자 재미 한인경위대에서 미국 국방의 일원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편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은 일본과 싸우는 한국 독립운동 세력과 재미 한인들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일전에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미주 한인들은 미국의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한반도 침투 작전인 냅코프로젝트(NAPKO Project)에 참여하였다. 미국 전략정보국의 야전 침투 훈련[Field Experimental Unit]에서는 미군의 지휘 하에 재미 한인들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벌이는 냅코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장석윤·변일서(邊日瑞)·이태모(李泰模)·이초(李超)·차진주(車眞宙)·박기벽(朴基闢)·김강·변준호(卞俊鎬)·이근성(李根成)·유일한(柳一韓) 등의 재미 한인들과 맥코이 포로수용소에서 선발된 한인 포로들이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로스앤젤레스 앞의 작은 섬 산타 카탈리나(Santa Catalina)에 유격훈련, 무선 훈련, 폭파 훈련 등을 받았다. 재미 한인들은 한국에 침투하기 위해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일제가 항복을 하면서 한반도 침투 공작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미주 독립운동의 지도자

미주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대목은 이승만안창호가 펼친 활동이다. 이승만안창호는 미주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을 이끈 최고의 지도자였다. 이승만하와이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을 옹호하는 동지회가 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워싱턴 D.C.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대미 외교 활동을 펼쳤다. 여기에 비해 안창호는 북미 지역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공립협회를 창설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이끌었고, 대한인국민회흥사단안창호 독립운동 노선을 지지하는 단체이며 최대의 세력이었다.

참고문헌
  • 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캘리포니아 리들리, 1959)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 독립운동』(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2005)
  • 홍선표, 『재미 한인의 꿈과 도전』(연세대학교출판부, 2011)
  • 김도형, 『미주 한인 사회의 한국독립운동』(역사공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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