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한인 사회의 인권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미국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미국에서 행해지는 재미 한인과 재미 한인 사회에 대한 인권 차별 양상.

개설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이 주류 사회로부터 경험하는 인권 차별의 양태들과 한인 사회 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다른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현상을 살펴봄으로써 한인 사회를 인권적 측면에서 조명한다.

소수 민족으로서 한인의 지위를 일깨워 준 4·29 폭동

1992년 4월 29일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는 약탈, 방화, 총격전 그리고 살인 등이 도처에서 자행되는 무법천지로 순식간에 변모했다. 이 인종 폭동은 미국 최초의 다인종 폭동 사건이었다. 미국의 역사에서 인종 폭동은 드문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인종 폭동은 주로 흑백간의 갈등이 폭동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4·29 폭동은 흑인, 백인은 물론 한인, 멕시칸, 아시안, 라티노 등 다인종이 피해자 또는 가해자로서 폭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는 특징을 보여 준다. 1992년 4월 30일 오후 6시부터 5월 3일 새벽 5시까지 실시됐던 통행금지 기간 중 체포된 인종의 분포는 라틴계 45.2%, 흑인 41%, 백인 11.5% 등으로 4·29 폭동이 다인종 폭동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는 한인들이 입었다. 한인은 그날 엄청난 재산 피해는 물론 정신적 충격을 경험했다. 약 2,280여 개의 업소가 전소되거나 약탈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흑인 지역인 사우스 센트럴(South Central) 지역에서 전소된 업소의 약 50%가 한인 소유 업소였다는 사실은 한인 상인들이 ‘인종 갈등’의 가장 큰 표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도 미국인 정치가, 언론, 지식인, 진보 단체 그 어느 편도 한인들을 크게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덕 상인’, ‘자업자득’ 이라는 비난의 시선으로 한인 사회를 따갑게 바라봤다.

4·29 폭동으로 한인 사회는 자신들이 백인이 아닌 ‘소수 민족’의 일원이라는 때늦은 자각을 하게 되었다. 100여 년 전 한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기 시작한 이래 미국은 언제나 한인들에게 기회의 나라를 의미했다. 그들은 주류 사회로의 진출을 목표로 삼고 오직 앞만 보면서 살아 왔다. 특히 l97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신이민자들 대부분은 자녀들에게 미 주류 사회로의 동화를 목표로 이른바 미국화 교육에 집중했다. 한국어, 한국 문화 그리고 한국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미국인으로 살아가도록 영어 교육 그리고 미국화 교육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러한 맹목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대가는 4·29 폭동으로 인한 미국 주류 사회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되돌아왔다. 이민 후 온갖 희생과 고통을 견디면서 자식 세대의 주류 사회 진입을 위해 마련한 전 재산은 일순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의 한쪽 면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미국을 단지 민주주의, 자유, 평화, 평등의 국가라고 관념적으로만 믿고 살았던 것이다. 미국의 다른 한쪽 면, ‘인종 차별’이라는 일그러진 얼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면 백인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갖고 살아 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하고 미 주류 사회에서 일해 온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 내의 ‘보이지 않는 인종 차별’을 실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일깨 워준 사건이 바로 4·29 폭동이었다. ‘소수자로서의 재미 한인’으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된 4·29 폭동은 한인들에게 100년이 지난 한인 이민사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인종 차별적인 미국 사회

미국 사회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려면, 인종 문제의 역사적·구조적·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종 문제는 미국이 안고 있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모순들을 복합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인권 선언을 담은 내용으로서 미국이 매우 인권 친화적인 나라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인권의 발달을 위해 많은 공적을 남겼다. 미국은 국제 인권 규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모든 인류의 생명권과 기타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모욕적인 처우나 형벌을 받지 않을 권리를 선언하고 있는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의 채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대표적인 예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 규준을 준수하는 데에는 소극적인 입장을 드러냄으로써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사형 제도와 고문 받지 않을 권리 등에 관한 조항 등 많은 조항들을 유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적인 인권 기구인 국제사면기구[Amnesty International]는 경찰과 같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가 소수 민족 혹은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과 사형 제도와 같은 인권 침해 사법 제도가 유지된다는 점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로 경찰이나 교도관에 의한 인권 침해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미국의 인권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1991년 로스앤젤레스의 백인 경찰들이 흑인 로드니킹을 무차별 집단 구타한 사건은 경찰에 의한 인권 침해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1980년 이후 미국의 교도소 수감자의 수가 세 배 이상 증가했다는 점, 수감자의 60% 이상이 소수 인종 혹은 민족 출신이고 또 그중에서 반 이상을 흑인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인권 상황을 대변해 주는 지표들이다. 특히 미국의 사형 제도는 인종 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 인구 중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2%인데, 사형수 중 42%가 흑인인 반면 이들을 기소하고 판결을 내리는 사법 체계는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미국은 애당초 이민자의 나라로 출발한 만큼, 다민족 국가로서 인종 차별의 뿌리가 깊다. 흔히 미국 내 인종 차별은 흑인 집단이 가장 심각한 대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아시아계에 대한 편견과 차별 또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아시아인들의 이민이 이루어진 1800년도 후반에는 아시아인들을 경멸하고, 비하하는 행위가 다반사로 일어났고 잦은 테러의 대상이 되었지만, 미국의 법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지켜 주지 못했다. 1882년 중국인배척법[the Chinese Exclusion Act]이 제정되어 체계적으로 동양인들을 차별했다. 190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한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남긴 회고록을 보면 한인 이민자들은 중국인 혹은 일본인과 동일한 집단으로 취급되면서 여러 형태의 인종 차별을 경험했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화장실, 영화관, 이발관을 백인과 함께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거주지와 직업 선택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인들은 강제 집단 수용소에 억류되기까지 했다. 최근까지도 아시아계를 겨냥한 시위나 테러가 자행되고 있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음성적 차별 행위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그럼에도 미국 주류 사회는 미국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진 민주주의 국가로서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는 인식을 설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 주류 사회의 자기 인식은 인종, 민족 그리고 성차별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애초에 백인을 위해 수립된 국가였다는 역사적 인식이 필요하다. 1790년 제정된 귀화법[Naturalization Act]은 백인만이 미국 시민이 될 자격이 있다고 명시함으로써, 유색 인종들은 노동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과 수단으로서 부득이하게 데려온 인적자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색 인종에게는 미국 시민이 될 자격도 없었고 그들에게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할 의도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자유, 평등 그러고 정의의 사회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백인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으며, 소수 민족들은 바로 백인들이 누리는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대상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인권과 관련하여 ‘인권은 보편적이며 불가분적이다.’라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모든 인권은 사회적 지위나 인종적 민족적 기원, 성적 지향성 또는 경제적 수준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 의해 향유되어야 함에도 소수 민족이나 사회적 하층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이 침해당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부유한 강대국이지만 빈부의 격차가 크고 사회 보장 제도가 유럽에 비해 뒤떨어져 있는 나라이다. 이러한 빈부 격차 현상은 인종 문제와 결합하여, 대부분의 빈민층은 흑인이나 히스패닉 같은 소수 민족에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이들 소수 민족 집단에서 마약과 알코올 중독이 만연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문제로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소수 민족 집단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다. 물론 연방 및 개별 주들의 법률은 인종, 성별 등에 기반을 둔 차별을 금지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 민족 집단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차별 현상도 현재 진행형이다.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소수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인의 경제적 지위와 ‘모범 소수 민족’

미국의 사법 제도 운용은 빈곤층이나 소수 민족 등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하다.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가에 피고인의 처벌이 크게 좌우되는 미국의 사법 제도에서 빈곤한 사회적 약자는 유죄 판결을 받을 확률이 월등히 높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의 인권 상황은 경제적 수준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미국 사회에서 재미 한인의 경제적 지위는 적어도 중간 이상은 되는 듯이 보이다. 대부분의 조사에서 한인 이민자의 연평균 가계 수입은 이민자 전체의 평균을 훨씬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5년 이후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은 주로 중산층 출신이었으나, 미국 이민 후 그들은 직업의 하향 이동을 경험했다. 대다수 이민 1세대들은 영어에 서툰데다가 백인 중심 미국 사회의 편견과 장벽 때문에 노동 시장에서 전문직이나 화이트칼라 직업을 갖지 못한 채, 한인 민족 경제나 저임금을 특징으로 하는 노동 집약적인 직업들에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이민 온 한인들에게서 노동직, 기능직 등과 같은 블루칼라 직종 종사자의 비중이 더욱 커졌다. 그리하여 재미 한인의 대다수가 더 이상 가게 주인이 아니라 노동자이고 한인 중 적잖은 비율이 미연방 최저생계선 이하의 수입을 얻는 데 그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미국 내 한인의 경제적 지위와는 별도로 미국 사회에서 한인은 소위 ‘모범 소수 민족’을 대변하는 성공적인 민족으로 칭송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인들은 미국 사회에 ‘절대로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불리면서 미국 시민이 될 자격도 없었다. 인종적으로 열등한 아시아인들은 노골적인 인종 차별과 탄압을 받았고 막노동직에만 종사하면서 겨우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냉전 구도 하에서 군비 경쟁이 시작되면서 아시아인들은 1952년 「맥캐런-월터법」 제정을 통해 미국 시민이 될 자격을 갖게 되었으며 법적 지위도 상승했다.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조용한 아시안들’이라는 제목으로 아시아인들의 성공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집단 투쟁을 전개하면서 미국 정부에 시끄러운 요구를 제기하는 동안 아시아인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경제적 향상을 위해 자조 노력을 수행하고 있다는 요지의 언론 보도는 분명 과격한 흑인과 조용한 아시아인들을 비교하면서 흑인들도 아시아인들처럼 정부에 요구만 하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시아인들이 1965년 이민법 제정 후 대거 미국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토대로 해서였다. 아시안들은 높은 교육열과 성실성 덕분에 짧은 시간에 급성장했다. 이제 한인을 위시한 아시아인들은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의 모습에서 이제는 ‘모범 소수 민족’이라는 칭송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모범 소수 민족론은 동양인들은 조용히 열심히 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확산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러한 고정 관념은 동양인은 능력이 있어도 매니저 또는 CEO로 승진하지 못하는 유리 천장 현상의 배경이 되고 있다. 또한 이 모범 소수 민족론은 동양인을 다른 소수 민족과 비교하기 때문에 흑인과 라틴계와의 마찰 위험을 고조시키며 실제로 한-흑 갈등은 물론 한-라티노 또는 동양인-라티노 갈등의 불씨를 점점 더 키우고 있다.

인권 침해 피해자로서의 한인

미주 한인에 대한 『미주 중앙일보』의 2000년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재미 한인의 30.4%는 주류 사회로부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인간적 모욕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였으며, 취업이나 승진상의 불이익 경험은 13.7%, 소속 집단 따돌림 경험도 9.6%가 있다고 응답하였다[『미주 중앙일보』 2000년 9월 21일자 참조]. 이러한 결과는 관습법 제도와 같은 문화적 차이로 특히 언어의 미숙으로 몰이해와 권리의 박탈을 재미 한인이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부분의 재미 한인은 일상생활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편견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들 중 일부는 미국 사법 제도 안에서의 인권 침해 문제를 보여 준다.

특히 ‘이철수 사건’은 한인 사회에서 미국의 사법 제도와 인종적 편견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이철수는 12세에 도미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이철수는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옥에서 백인 죄수를 살해했다. 그것이 정당방위였음에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 사건은 한인 사회에 알려져 이철수의 석방을 위한 대대적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백인 사회에 홀로 던져진 불우한 한국 청년이 어떤 식으로 본인의 무지와 무능력 그리고 백인 사회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시민의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보여 준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된다.

이철수 사건 외에도 미국 사법 제도에 의한 대표적인 인권 침해 사례로 지목되는 것은 인종 차별적 교도 행정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백광흘 사건이다. 백광흘은 1979년 차이나타운 살인 사건으로 기소되어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백광흘은 3년 후면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다던 변호사의 말과는 달리 아직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 백광흘은 수감 중 흑인, 라틴계의 괴롭힘에 시달렸으나, 간수가 백광흘이 태권도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살인죄를 씌워 이제는 종선수가 되었다. 경찰에 의한 한인의 인권 침해 역시 없지 않았다. 1996년 2월 미국 서부인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는 경찰의 불심 검문에 불응하고 도망하던 김홍일이 경찰에 포위돼 집중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1996년 5월에는 한인 타운 인근에서 소란을 부리던 홍병칠이 경찰 체포 과정에서 질식사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한인 사회의 반감을 샀다. 한인들은 인권 침해적 상황에 처해도 미국의 법과 제도에 무지하여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데 소극적이다. 미군과 결혼한 한국인 아내들은 높은 이혼율을 보이는데, 이혼의 가장 주된 요인은 남편인 미국 남성이 동양인인 한국 여성은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토대로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막고 가정에서 발언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한국 여성은 이혼 시에도 위자료를 지급받는 경우가 거의 전무하고 자녀 양육비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다. 남편은 미군 부대 변호사를 동원하는 반면, 한국 여성은 미국 법률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문화적 몰이해로 인해 사법 제도에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강현구는 1999년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서 갱단을 조직하고 강간, 강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미국 법정에서 271년형을 선고받았다. 같이 구속된 청년들이 강현구를 ‘형님’으로 부르는 관행을 법정 통역사가 영어의 ‘보스’로 이해하고 번역한 탓에, 강현구가 갱단의 두목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동양인 배심원이 한 명도 없는 법정에서 판사와 검사가 모두 흑인이었기에 문화적 몰이해가 발생한 것이다.

인권 침해 가해자로서의 한인

재미 한인들은 정착 초기 미국 노동 시장에서의 불리함을 자영업으로 극복하여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흑인 및 소수 민족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한인들은 흑인이나 히스패닉에 대하여 강한 편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무지나 신분상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법적이고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미국 한인들은 단순히 인종 차별에 의한 인권 침해의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가해자의 입장에 서기도 함을 의미한다. 실제로 한인 사회 내부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가 발견된다. 한인들은 식품점, 식당, 카페, 봉제업 등과 같은 단순 노동에 기초한 사업체를 주로 운영한다. 이러한 한인 업체는 불법 체류 한인과 멕시코인 등의 소수 민족을 고용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한인 사업체에서 이 고용인들에 대한 착취 및 인권 유린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인노동상담소[Korean immigrant Workers Advocates]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 한인이 경영하는 식당의 경우 종업원들은 대체로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으며 주 72시간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종업원들은 고용주로부터의 부당 해고와 정신 및 육체적 학대의 위협 아래 근무했다.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면서도 상해 보험이나 의료 혜택이 제공되지 않아 노동 조건이 매우 열악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임금 체불, 부당 해고, 인격적 모독, 복지 혜택의 부재 등의 문제는 식당업만의 현상이 아니고 청소업, 봉제업 등과 같이 단순직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직종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것은 한인 사회 내에 노동자 인권 침해 사례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인권 침해는 불법 체류자들의 경우 더 심각한 형태로 나타난다. 한인 경영 식당이나 청소 회사 등에서 고의적으로 불법 체류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키면서 신분상의 약점을 악용하여 권익을 침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인 사회 내에서의 노동자 인권 침해 사례는 히스패닉계 노동자와 같은 다른 민족을 상대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또 다른 문제이다. 『LA타임즈』[1998. 9. 6]에 따르면, “LA 한인타운에는 300여 개에 달하는 한인 운영 식당과 카페가 있었는데, 업소 종업원 2,000여 명 중 3분의 1이 히스패닉계이며 최근 연방노동국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43개의 한인 운영 식당 중 무려 41개가 노동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처벌을 받았다.” 한인들은 흑인이나 히스패닉계에 대하여 강한 편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무지나 신분상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법적이고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한인들이 단순히 인종 차별에 의한 인권 침해의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가해자의 입장에 서기도 함을 뚜렷이 보여 준다.

재미 한인에게 고용된 히스패닉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체불 사례가 빈번했다. 이 히스패닉 노동자들은 공식적인 고발 및 보상 절차를 밟을 수 있는 합법 신분이 아닌 경우 최저 임금 이하의 임금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임금 체불이 일어나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한인 가게 또는 공장에 고용된 히스패닉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신분이었음을 감안하면, 빈번한 임금 체불 문제는 한인 업주의 도덕성과 노동자의 인권문제와 결부된 민감한 사안이었다. 여기에는 단순히 경제적 빈곤의 문제를 넘어선 피고용자가 히스패닉이고 고용자가 한인이라는 측면에서 인종적인 갈등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 한인은 일부 히스패닉에게 ‘가족 같은 관계’를 이용하여 법정 기준을 위반한 저임금과 노동 착취를 강요하는 고용주였고, 임대료를 비싸게 부르는 부동산 주인이었고, 그들을 하대하는 가게 주인이었다.

문화적 차이와 인종 갈등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들은 언어 장애, 문화적 차이 그리고 미국 사회에 대한 몰이해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단일 민족 사회로 이해된 한국 사회에서 타민족과의 접촉 경험이 부족했던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과 같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서 생활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단순한 언어적 불소통 또는 관습의 차이는 심각한 인종 분규를 일으키는 촉진제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대화할 때, 상대방과 눈을 맞추는 것을 꺼린다. 상대방에게 눈을 맞춘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도전 또는 무례한 행동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지 않으면 오히려 무례한 행동이 되는데, 흑인고객들이 한인 상점에 들어와 한인 상인과 대화할 때 한인 상인이 고객에게 눈 맞춤을 하지 않는 것이 흑인 고객인 자신을 무시하는 무례한 태도로 생각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한인들에 대한 반감 또는 증오심을 키우는 문화적 배경이 되었다. 또 다른 예로는 통상 미국에서는 잔돈을 하나하나 세서 정확한 액수의 돈을 고객의 손에 쥐어 준다. 그런데 한인 상인들은 거스름돈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면서 손님이 스스로 집어가도록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한인의 상행위는 흑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갖도록 했다. 게다가 한인들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올 때 흑인이나 다른 소수 민족에 대한 강한 편견을 갖고 왔다. 한인들은 백인에게는 불필요할 정도로 저자세를 취하지만, 흑인이나 라틴계에 대해서는 고압적인 자세로 대하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을 한다.

미국을 보는 시각의 차이 역시 한-흑 갈등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기회의 땅으로 보는 한인들은 흑인들의 불성실하고 게으른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노예로 팔려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이등시민으로 살아온 흑인들은 대체로 미국을 인종 차별의 국가로 바라본다. 따라서 흑인들은 미국을 기회의 국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인들이 흑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잘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누구의 탓도 아닌 흑인 스스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흑인들은 한인들이 흑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 흑인 사회를 착취해 흑인 경제의 황폐화를 초래한 외부인으로 바라본다.한인들은 4·29 폭동 이전에는 흑인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열심히 일해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흑인 사회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는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고취시켰으며, 한-흑 갈등을 조장한 주요 원인이었다. 한인들은 4·29 폭동 이후 다민족·다인종 사회의 일원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흑인을 비롯한 타 소수 민족에 대한 편견을 지양하고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산다는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

재미 한인 사회의 인권 침해 극복 방안

재미 한인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양상의 인권 문제는 미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인종 차별 및 사법 제도와 같은 구조적 요인과 한인들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 해결책도 이 두 가지 요인을 동시에 고려했을 때에만 찾아질 것이다. 우선 문화적 차이로 야기되는 인권 침해는 개인들이 미국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 차별과 같은 구조적, 제도적 문제는 집단의 정치력을 배양함으로써 문제를 완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인 사회 인권 문제의 해결 미래는 정치적 맥락에서 그 방향이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선 한인은 미국 사회에서 소수 민족의 일원이며, 인종 차별은 소수 민족들이 모두 직면하고 있는 공통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한인 사회가 당면한 인권 문제의 해결은 ‘백인’ 행세가 아니라 타 소수 민족과의 정치적 연대를 통해 소수 민족의 권리를 추구하는데 있다. 이를 통해 한인 사회는 다민족 사회인 미국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앞으로 재미 한인 사회는 중심세력이 이민 1.5세, 2세로 바뀌어감에 따라 많은 질적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젊은 세대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태어나 문화적 적응에 아무 어려움이 없고 따라서 사회적, 경제적 적응 면에서 이민 1세대와는 다를 것이며 미국 주류 사회로의 진출도 활발할 것이 예상된다. 그리하여 장차 재미 한인 사회에서의 인권 문제는 개개인이 갖는 문화적 혹은 경제적 요인에 의한 인권 침해보다는 인종 차별과 같은 사회구조적인 차원의 인권문제가 중심에 설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한인 사회의 정치력의 신장과 타 소수 민족과의 연합이 인권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문헌
  • 최협, 『다민족 사회, 소수 민족, 코리안 아메리칸: 재미 한인 사회에 대한 사회 인류학적 접근』(전남대학교 출판부, 2011)
  • 장희수, 「LA 폭동과 라티노」(『학림』33,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2012)
  • 『미주 한인 이민 100년사: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서』(한미동포재단·미주 한인이민 100주년 남가주 기념사업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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