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용

한자 黃思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멕시코 유카탄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4월 27일
활동 시기/일시 1909년
몰년 시기/일시 1964년 3월 21일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
활동지 멕시코 유카탄주
묘소 경기도 남양주
원어 주소 Yucatán, México
성격 독립운동가|종교인
성별
대표 경력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견묵위원
정의

1909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멕시코 한인을 돕기 위하여 파견하였던 견묵위원 중 한 사람.

개설

황사용[1881~1964]은 1909년(순종 3) 방화중(邦化重)과 함께 견묵위원(遣墨委員)의 자격으로 멕시코[한자로 묵국(墨國), 묵서가(墨西哥) 등으로 음역하여 불림]의 유카탄주를 방문하여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설립에 앞장섰고 메리다 교회를 조직하였다.

활동 사항

황사용은 1881년(고종 18) 4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0세에 부모를 여의고, 8년 후인 1899년(고종 36)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3년(고종 40) 미국의 하와이 농장에 노동자로 이민하였고, 2년 후인 1905년(고종 42)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공립협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황사용은 당시 감리교 전도사로도 활동하였다. 1909년 4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특파원[견묵위원] 겸 대한제국 대표로서 방화중과 함께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를 방문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설립된 이후인 1909년 6월 16일 방화중이 멕시코를 떠났고, 황사용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정착되도록 도움을 준 데 이어 구제 사업에 뛰어들었다. 황사용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관이 건립되자 이곳에 메리다 교회를 조직하였다.

황사용은 1910년(순종 4)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샌프란시스코로 복귀하기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메리다 교회는 이후 교인이 300여 명으로 늘어났지만 교역자가 없어 문을 닫았다. 황사용은 1964년 3월 21일 향년 83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황사용은 사후 경기도 남양주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09년 황사용이 방화중과 함께 멕시코에 가서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한 공로는 인정할 만하다. 이듬해 황사용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하와이를 방문하여 동포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1911년에는 총회장으로서 러시아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19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특파원으로 하와이에 파견되어 상해임시정부의 지지를 이끌었고, 하와이 국민대표 기성회 회장으로 재외동포의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서울 정동예배당과 신의주 산정현교회 등에서 강연회를 통해 국민 계몽과 애국심의 고취에도 힘썼다. 흥사단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독립’의 발기인, 샌프란시스코 대표단 대표,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합국회 대표 등으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헌신했지만 국립묘지에 묻히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 「황사용 목사의 106년전 멕시코 유까딴 선교 현장 확인」(『미주한국일보』, 2015. 7. 29.)
  • 「그는 가족을 버리고 ‘한국’과 결혼한 듯했다」(『미주중앙일보』, 2016. 11. 17.)
  • 「52. 황사용(1881-1964)」(『미주크리스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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