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특별한 이야기

쿠바 한인의 독립운동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쿠바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주소 Cuba
영문 주소 Cuba
정의

1920년대 초 멕시코에서 쿠바로 건너간 한인들의 독립운동 역사.

개설

1905년(고종 42) 멕시코 유카탄주에 노동 이민을 왔던 한인들 중 약 280명이, 멕시코혁명과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쿠바로 재이민을 떠났다. 쿠바 마탄사스주(Matanzas州)에 정착한 한인들은 1921년 6월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지방회]를 설립하였고, 이어서 마나티(Manati)지방회, 카르데나스(Cardenas)지방회, 아바나(Habana)지방회를 설립하였다.

쿠바의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였으며, 1943년 재큐한족단을 결성하여 쿠바 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과 재류 한인의 안정을 요구하였다. 쿠바의 한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무금, 인구세, 국민 부담금, 임시정부 후원금,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 각종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

멕시코 한인의 쿠바 재이민

1905년 멕시코로 이민을 온 한인들은 에네켄 농장에서 4년간의 계약 노동이 끝나고 1909년(순종 3) 5월 농장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멕시코혁명이 일어나면서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1917년부터 몇몇 한인이 쿠바로 이주를 하였다. 그리고 많은 한인이 경제 상황이 좋은 쿠바로 재이민을 구상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쿠바에는 설탕 붐이 일었는데, 당연히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멕시코 한인들은 쿠바가 “도처(到處)에 춘풍(春風)”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쿠바의 아바나 항구에서 영업을 하던 이해영[이청룡]이 멕시코 한인들의 쿠바 이주를 주선하였다. 이해영은 마나티 사탕수수 농장이 좋다고 하여, 오래전에 쿠바로 이주하였던 사람이다. 이해영은 쿠바 이민국장과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 한인 약 400명을 데리고 오기로 약조를 하였다. 그는 1921년 2월 25일 베라크루스항에서 한인 81명을 태우고 떠났고, 2월 27일 프론테라(Frontera)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98명을 더 실은 후 3월 3일에 프로그레소항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도 그의 조카 이인상이 95명을 더 모아 3월 6일 총 274명을 태우고 쿠바로 출발하였다. 『신한민보』 1921년 4월 7일 자 기사에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원 42명과 그 가족 95명이, 푸엘토(El Puerto)와 프론테라 지방회 회원 67명과 가족 193명이 쿠바로 이주하였다고 나온다.

쿠바 이주 한인들의 경제적 고난

한인들은 1921년 3월 11일 라스투나스주 마나티항에 도착했으나 쿠바 이민국에서 정부의 명령 없이 노동자의 입국을 허가할 수 없다고 하여, 3월 14일 아바나 근처 마리엘서 나세레토 지방 이민병원에 상륙하여 6일 동안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3월 26일 타고 온 배를 다시 타고 2일 만에 마나티항에 돌아왔다. 이곳에서도 여권 문제로 상륙을 못하다가 2일 후 마나티 지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쿠바에 온 한인들은 계약에 따라 마나티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집단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인들이 쿠바로 온 이후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작업량이 줄고 노임도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국제 설탕 가격이 폭락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주 직전까지만 해도 파운드당 20센트였던 것이 나중에는 2센트로 거래되었다. 그 타격은 곧 한인 노동자들에게 전가되었다. 임금이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급기야 농장들이 생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인들의 마탄사스 정착

쿠바에 온 한인들은 마나티 사탕수수 농장보다 생활이 좀 나은 곳을 찾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탄사스주 에네켄 농장에서 일손을 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21년 5월 31일 일단의 한인들이 마탄사스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마탄사스는 지성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음유시인과 문학가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처음 박창운김세원이 마탄사스주의 에네켄 회사에서 일을 구한 후, 농장주를 설득하여 마나티에 있던 한인들을 불러모았다.

마탄사스주로 온 한인들은 마탄사스의 핀카 엘 볼로(Finca El Bolo)에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그러나 그해 마탄사스 에네켄 농장의 일이 별로 없었고, 한인 노동자의 숫자는 많아서 부득이 제한적으로 노동을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인 노동자들의 수입은 매주 2~3달러에 불과하였다. 한인 노동자들은 박창운의 주선으로 다시 카르데나스나 아바나 등지로 옮겨 가게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설립

마탄사스 이주 얼마 후 아바나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한인들도 일본 재외국민으로 등록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에 박창운 등을 비롯한 한인들은 등록을 거부하고, 이런 경우가 재발할 경우에 대비해 한인 대표 기구를 만들기로 하였다. 마탄사스의 한인 60여 명은 임시공동회를 개최하여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북미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청원하였다. 1921년 6월 14일 자로 지방회의 설립이 받아들여졌으며, 7월 6일 자로 인준장이 발급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임원으로는 회장에 서문경, 부회장에 이회택, 총무에 이인환, 서기에 임병일, 재무에 장성일, 법무에 김덕순, 학무에 정원성, 구제원에 호근덕, 외교원에 박창운, 대의원에 박두현, 사찰에 박희성 등이 선출되었다. 쿠바지방회는 그해 11월 1일 마탄사스 지방정부에 정식으로 관허장을 신청하였다.

1922년 10월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는 ‘쿠바지방회자치제’를 실시하였으며, 회관은 북미의 대한인국민회에서 보낸 돈 300원으로 신가옥을 구입하였으며, 1925년부터 쿠바의 한인들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인구세를 내기로 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가 설립된 후 마나티에 남아 있던 한인들에 의해 대한인국민회 마나티지방회가 창립되었다. 마나티에 거주하던 한인 30여 명은 1921년 9월 21일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설립을 청원하여 인준장을 얻었다. 또한 마탄사스 인근 설탕 무역항이 있던 카르데나스로 옮겨 간 한인들 30여 명도 지방회를 조직하고 1922년 3월 7일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인준장을 받았다.

이로써 마탄사스, 마나티, 카르데나스 세 곳에 대한인국민회의 지방회가 설립되면서 쿠바 지역 한인들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바나의 한인들은 1937년 2월 7일 아바나지방회를 설립되었다.

쿠바 한인들의 독립운동 선전 활동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가 설립된 이후 한인들은 1923년 3.1절을 맞이하여 선전 시위 행렬을 하였으며, 쿠바 신문에 우리 민족의 사정에 잘못 게재된 사실이 있으며 이를 반박하고 대표를 보내 교정을 시켰다. 1937년 1월 30~31일, 1938년 2월 26~27일 마탄사스 정부가 주최한 자선구제회에 참가하여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렸다. 1938년 11월 28일 아바나에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환영 대회에도 태극기와 쿠바 국기를 교차한 자동차로 대행렬에 참여하였다. 그 외 쿠바의 관인들이 한인들을 방문할 때마다 환영회를 개최하고, 쿠바의 대행렬에도 참가하여 쿠바인들에게 동정을 받았다.

쿠바 한인의 민족교육

쿠바의 각지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에서는 국어학교를 설치하였는데, 최초의 국어학교인 민성국어학교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관에 있었다. 쿠바지방회에서는 1922년 11월 1일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양춘명, 사무원에 이영환, 교사에 서병학 등을 선임하였다. 민성국어학교는 미국에서 교육비로 100여 원을 보내 와 1923년부터 본격적으로 국어 교육을 시작하였으며, 학부형 및 찬성원과 지방 임원의 도움과 후원으로 수업을 계속하였다. 민성국어학교에서는 임천택이 1925~1927년까지 교사로 활동하였고, 이세창방경일이 1928~1930년까지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세창은 1932~1936년까지 교사로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26일 카르데나스에도 진성국어학교를 세워 한인 2세들의 국어교육을 담당하였다. 진성국어학교는 1939년 3월 4일부터 중단되었으나, 1940년 2월 4일 다시 학교 문을 열었고, 학생 수는 20명이었다.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에서는 흥민국어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2세들에게 민족 교육을 시켰다.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관에서는 매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애국가를 불렀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는 1926년 9월 한인 청년들을 위해 청년토론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나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임천택이 청년들의 교육기관을 창립하기 위해 ‘청년학원 창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쿠바지방회의 허가를 받았다. 임천택은 선언서를 발표한 후 1932년 3월 10일 정식으로 청년운동 교육기관인 청년학원을 창립하였다. 청년학원을 창립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야학을 하고, 독서회, 동화회, 토론회, 강연회 등을 열어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함양하고자 하였다. 청년학원에서는 1932년부터 1934년까지 한국 역사 10차, 토론회 10차, 동화회 20차, 독서회 50차 등 도합 90차의 집회를 가졌다.

쿠바 한인의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

쿠바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후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제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금’과 ‘임시정부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납부하여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임천택『쿠바 이민사』에 의하면, 자신은 1931년부터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의 임시정부와 통신을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백범일지』에도, “쿠바의 임천택·박창운 등 제씨가 임시정부에 후원하였다.”고 나온다. 임천택 등 쿠바의 한인들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있기 이전인 1931년부터 백범(白凡) 김구(金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는 1921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인국민회에 의무금을 냈고, 지방회 외교비, 구제비 등의 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쿠바의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통해 임시정부에 인구세를 납부하고 있었다. 1940년 6월 쿠바지방회에서 인구세 1달러씩과 의무금[부담금] 1달러씩, 총계 62달러를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냈다. 1937년 10월부터 1939년 2월까지 대한인국민회 부담금 360원 50전을 보냈다. 1941년 1월 쿠바지방회에서는 인구세를 비롯하여 광복군 후원금으로 1원 4전을 받을 것을 의결하였다. 1940년 말부터 1941년 초까지 광복군 후원금 78원 30전, 1941년 10월부터 1944년도까지 독립금 850원 88전을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로 보냈다. 그리고 독립금 246원 5전을 아바나의 중국인 은행을 통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에게 직접 송부하였다.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쿠바 한인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후 쿠바 재류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신분상의 안녕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아바나의 라디오에서 한국인은 일본인과 같다고 방송하였기 때문에, 쿠바 정부에서는 한인들을 일본인과 같이 감시하여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심지어 마탄사스 한인촌을 일본인의 정탐 지역이라고 하여 지방 사령부에서 체포령이 내려지는 등 위기에 처하였다. 쿠바 국방위원장이 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한다는 발표를 하면서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의 한인들은 금족을 당하였다.

이에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 상무부는 워싱턴의 주미 외교위원부에 연락을 취하고, 주미 쿠바 공사와 교섭하여 한인들의 안녕 보장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에서는 주쿠바 중국 공사에게 한인들의 안전 보장을 부탁하고,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가 한인들 가운데 친일 분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들에 대한 처치를 하자고 하였다. 쿠바의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닌 ‘자유 한인’임을 밝히는 데에 총력을 경주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는 1941년 12월 14일 쿠바 한인의 입장을 밝히는 ‘한인 입지 연설’ 3,000매를 인쇄하여 시내에 뿌렸고, 한국인임을 증명할 수 있게 옷에 꽂을 수 있는 소형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 같은 쿠바 한인들의 노력으로 인해 12월 23일 쿠바 대통령 등 정부 당국은 ‘한인에 관한 입지 보고’를 받고 한인들의 신분을 인정하였으며, 이 내용을 『엘바이스』와 『임폴마시옹』 두 신문에 게재하게 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쿠바에 재류하는 한인들에게 쿠바 국기와 태극기를 교차한 증명패를 발급하였다. 이 증명패는 스페인어로 쓰여 있어 쿠바인들이 한국인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보낸 증명패는 아바나지방회를 통해 각 지방회에 배포되었다.

태평양전쟁기 쿠바 한인의 독립운동

1941년 12월 23일 마탄사스·카르데나스·아바나의 3개 지방회에서는 ‘연합외교위원회’를 조직하여 미국 대사관, 중국 공사관, 쿠바 정부·군·경 각 기관과 교섭을 하였다. 또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쿠바 한인들의 안녕을 보장받기 위해 재미 쿠바 공사와 교섭하여 그곳 정부의 동정을 얻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쿠바의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의 집회도 열 수 없었는데, 아바나지방회의 경우에는 1942년 2월 중순이 되어서야 집행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쿠바지방회에서는 자유롭게 집회를 할 수가 있어, 매월 열리는 통상회의는 정상적으로 개최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는 노동이 재개되면서 1942년 2월부터 매달 독립금을 거두기로 하였다. 그해 10월까지 의무금, 인구세, 독립금으로 모집한 금액이 280여 원에 달하지만, 쿠바 정부의 재산 동결법 때문에 송금하지 못하였다. 1943년 1월 쿠바지방회에서는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1원에 4전씩 소득세를 거두어 반은 경상비로, 반은 독립금으로 상납하기로 하였다. 1944년 1월에는 매주 수입 중 10원 이하로 버는 자는 1원에 4전씩을, 10원 이상을 버는 자는 40전씩 수금하되 수봉된 금액 중 반은 경상비로, 반은 독립금으로 상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1943년 12월 23일 동지회가 워싱턴사무소 개설 문제 등을 이유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탈퇴를 선언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재미 한인 사회가 분열되자 쿠바지방회는 독립금 상납을 정지하기로 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 쿠바 지부의 설립과 활동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1919년 8월 북미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이 결성되어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북미의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에서 1937년 6월 24일 쿠바에 지부를 설립하라는 편지를 보내 왔다. 이에 그해 7월 10일 대한여자애국단 마탄사스지부를 조직하게 되었고, 단장은 현미숙, 고문은 임천택이 맡았다.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이 성립된 이후인 1941년부터 대한여자애국단 마탄사스지부에서는 광복군을 후원하기 위하여 주일마다 1전 이상의 후원금을 모집하였다.

재큐한족단의 결성과 활동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습한 직후 쿠바 재류 동포들의 안녕 보장을 연합으로 주선하기 위해 1941년 12월 28일 쿠바의 3개 지방회 대표 11명이 쿠바지방회관에 모여 ‘재큐한족연합외교회’를 조직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는 쿠바의 수도에 있는 관계로 쿠바 정부와 외교적 교섭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에서는 이종헌·이인상·서병학 3인을 선전위원으로 두고 재류국 관청과 교섭을 담당하게 하였다. 북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쿠바의 수도에 있는 재큐한족연합외교회를 통해 쿠바 재류 한인들과 소통을 하고 있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보낸 한인 증명패는 재큐한족연합외교회를 통해 각 지역에 배포되었다.

그런데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 집행위원장 이종헌, 서기 서병학이 증명패를 받고도 알리지 않은 데다 이를 친일 분자를 가리지도 않고 배포하거나 중국인에게까지 팔았고, 쿠바지방회 몫인 170개 중 36개를 빼먹고 그 나머지만을 보냈다고 했다. 이에 쿠바지방회에서는 아바나의 재큐한족연합외교회를 해산하고, 교섭을 중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3월 28일 아바나지방회 대표 3명이 출석하여 특별 회의를 개최해 ‘재큐한족연합외교회’를 해산하기로 결의하였다. ‘재큐한족연합외교회’가 해산된 이후 연합국의 적국인 일본인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하여 자구책을 모색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쿠바 정부에 협조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한인들에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국적 문제의 해결이었다. 이를 위해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에서는 쿠바 당국과 교섭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아바나지방회가 쿠바 관청의 정식 인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에 관하여 자유롭게 교섭을 진행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는 쿠바 당국과 교섭하기 위해 1943년 4월 재큐한족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쿠바 한인들의 외교 활동

한인들은 쿠바 정부 당국과 사회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였고, 이에 쿠바 각지에 산재한 일본인 800명이 모두 구금될 때 한인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42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경축 행렬 때 참가하였으며, 12월 9일 쿠바선전기념 제1주년 기념행렬에 태극기와 쿠바 국기를 들고 행진을 하였다. 1943년 5월 20일 쿠바 독립 제41주년 기념식에 참가하여 스페인어로 “재큐한족단은 쿠바 국경일을 축하”라고 쓰고 태극기와 쿠바기를 들고 행렬에 참가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재큐한족단은 쿠바의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마탄사스·카르데나스·아바나 3개 지방회의 대표를 선출하여 3~4차 대표회를 열고 토의한 결과 전시 대외 선전을 위하여 외교기관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재큐한족단아바나 지방정부의 후원하에 1943년 4월 4일 정식 창립하여 쿠바 한인 사회를 대표하고 항일투쟁 의지를 대외에 천명하는 단체가 되었다. 그 목적은 ① 임시정부 후원, ② 국민회 옹호, ③ 재쿠바 동포 안녕보장, ④ 한국 독립 승인 선전공작, ⑤ 독립 후원금 모집 등이다. 재큐한족단은 “쿠바의 모든 동포를 모아서 식민지 지배하에 살고 있는 조국의 백성의 해방을 위해 일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과 함께 하기 위함이다”라고 설립 목적을 밝혔다.

이렇게 조직된 재큐한족단은 그해 4월 18일 정식으로 임원의 취임식을 가졌는데, 단장에는 아바나지방회 집행위원장 이종헌, 부단장은 이인상이 맡았으며, 감찰위원으로는 쿠바지방회에서 임천택, 카르데나스지방회에서 이명상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쿠바의 지방회에서는 재큐한족단의 조직 청원을 대한인국민회에 요구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이 문제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에 넘겨 영문으로 인준장을 발급해 주었다. 쿠바 정부로부터도 정식 허가도 얻어 재쿠바 한인들을 대표하는 공식 단체가 되었다.

재큐한족단의 주요 활동은 쿠바 재류 한인들에게 한인 증명을 발급하는 등 전시하의 안녕 보장을 이루는 일이었다. 그리고 재큐한족단과 각지의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는 외교 선전 활동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1945년 4월 15일 재큐한족단 단장 겸 아바나지방 대표 이종헌을 비롯하여 카르데나스지방 대표 이명상, 서기 서병학, 재무 방한조 등이 모였다. 그리고 그해 7월 29일 아바나에서 열린 한족단 대표회의에서 임원을 새로 선정하였는데, 단장에 이종헌, 부단장에 박창운, 한글서기에 서병학, 서문서기에 김성재, 재무에 이인상, 부재무에 방한조 등이 선출되었다.

참고문헌
  • 임천택, 『쿠바 이민사』(태평양주보사, 1954)
  • 이자경,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지식산업사, 1998)
  • 라울 루이스·마르타 림 김, 『쿠바의 한국인들』(재외동포재단, 정경원 외 옮김, 2004)
  • 호세 산체스, 『회상』-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한인들의 삶과 노동(재외동포재단, 서성철 옮김, 2005)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15(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2015)
  • Raul R. Ruiz·Martha Lim Kim, 『Coreanos en Cuba』(Fundación Fernando Ortiz, 2000)
  • 김도형, 「멕시코, 쿠바 한인들의 독립운동」(『중남미 한인의 역사』, 국사편찬위원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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