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중립국을 선택한 반공포로의 이주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브라질  아르헨티나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주소 Brasil|Argentina
영문 주소 Brazil|Argentina
정의

6·25전쟁 이후 제3국을 선택한 반공포로들의 중남미 국가 이주.

개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군사 충돌이다. 6·25전쟁은 한반도를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 지금까지 지속되는 분단 상황을 초래한 전쟁으로, 전쟁 중에는 많은 전쟁포로들이 발생했는데, 이들 중 일부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게 되었다.

반공포로는 남한에 잔류한 포로와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를 통칭하여 말한다. 당시 포로수용소에는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와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가 존재했다. 전쟁이 끝난 후 반공포로들은 공산주의 국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자유를 택했다. 반공포로 석방은 한국뿐 아니라 중남미 이민사에도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포로 교환과 제3국으로의 이주

북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육지의 수용소에,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는 거제도와 인근 섬에 분산 수용되어 있었다. 1953년 당시 남한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공산군 포로는 약 17만여 명, 북한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국군 및 유엔군은 약 1만 1599명이었다. 남한의 수용소에 있던 반공포로는 ‘중립국송환위원회’ 관련 협정에 따라 희망했던 지역으로 송환이 진행되었다. 중립국송환위원회는 인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위스, 스웨덴으로 구성되었다. 반공포로 8만 3071명은 1953년 4월 20일부터 5월 3일까지 1차로 6,670명이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송환을 거부한 포로 8만 6867명 중은 1차로 민간인 3만 9464명이 석방되었다. 2차인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2만 7388명이 석방되었다. 마지막까지 송환을 거부한 2만 2640명이 중립국송환위원회로 인계되었다. 휴전협정이 되기 이전이었다. 반공포로를 먼저 석방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 25일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 이후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일부 포로들은 남한보다는 제3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원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반공포로는 북한 출신 포로 74명, 행정 착오로 포로가 된 남한 출신 2명, 중공군 출신이 12명이었다. 협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남한, 북한, 유엔, 중립국송환위원회의 입장이 각각 달랐고 반공포로의 요구사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립국을 택한 반공포로들은 판문점 근처의 중립국송환위원회로 인계되었다. 반공포로들은 전쟁포로에 대한 조치에 의해 중립국송환위원회의 중재에 따라 인도로 가게 되었다. 인도로 가게 된 반공포로들은 1954년 2월 8일 인도군과 아스투리아스(Asturias)호를 탔고, 홍콩과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2월 22일 인도에 도착했다. 결국 1954년까지 총 62명의 포로가 북에 송환되었고 2만 1820명의 송환 거부 포로가 남한과 대만으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12명의 중국인과 89명의 한국인, 총 101명이 수용소를 탈출하였으며, 이들 중 많은 수가 중립국행 의사를 밝혔다. 중립국을 택한 반공포로는 총 88명으로 중국군 12명, 북한군 74명, 한국군 2명이었다.

인도에서의 생활과 중남미로의 이주

인도의 델리켄트 수용소에 머무는 동안 반공포로들은 UN에서 생활비를 지원받았고 이민을 희망하는 국가를 지목하여 수민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2년 반의 수민 승인 대기 기간 동안 직업교육 및 언어교육을 받기도 했다. 대부분이 미국 이주를 희망했으나, 미국은 교전 당사국이었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국가는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가 이주 대상 국가가 되었다. 이 중에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가장 먼저 수민 승인이 된 국가였다. 최종적으로 50명은 브라질로, 12명은 아르헨티나로 이동했고, 9명은 인도에 잔류하였다. 남북한 정부의 적극적인 공세로 6명은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4명은 남한으로 송환되었다.

브라질로 가게 된 반공포로들은 행선지가 정해진 후에 인도 주재 브라질 영사관에 초청을 받아 브라질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영사를 통해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기회도 가졌다. 1956년 2월 4일 인도항공의 특별기 편으로 뉴델리를 출발하여 카이로를 경유, 런던에 도착하였고 다시 환승하여 2월 6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김수조, 이중창, 장승호[미다할아버지]를 비롯한 환영객들이 반공포로들을 맞이해 주었다. 반공포로들은 무국적을 표시하는 인데피니두(Indefinido)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 항구 입구에 있는 섬인 일랴 다스 플로레스(Ilha das Flores)의 수용소에 입소했다.

아르헨티나를 희망한 1진 9명은 북한군 출신 7명과 중공군 출신 2명이었고, 2진은 5명이었다. 1진은 1956년 10월 21일 아르헨티나에 도착했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의 에세이사(EZEIZA) 공항에 도착했다. 2진은 멕시코로 가기를 희망했으나 멕시코의 수민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을 결정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957년 5월 11일 1진과 2진은 가톨릭 구호 기관인 가톨릭 이민청과 리노 신부의 도움을 받아 숙식과 구직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반공포로

1. 브라질 반공포로 51인

강호순, 강희동, 강영빈, 강석근, 김명복, 김석린, 김시봉, 김창언, 김능익, 김중진, 김흥복, 김남수, 김광서, 김희용, 김창준, 김서국, 남창진, 마호섭, 문명철, 박한모, 박정환, 박달묵, 백영훈, 석태훈, 손천기, 한홍익, 현학선, 황순성, 황덕림, 정성강, 주영복, 최부경, 최국주, 안인덕, 이준형, 이준희, 이응용, 이병활, 이장근, 이정일, 이봉엽, 임창용, 임관택, 임이호, 오희성, 오인선, 오일국, 유현국, 유필홍, 윤원식, 이순성

2. 아르헨티나 반공포로 12인

1진: 임익간, 한형모, 박창근, 박상신, 홍일섭, 장기두, 정재호

2진: 김관옥, 정주원, 조철희, 손재하, 이처균

중립국을 선택한 반공포로들의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주 과정과 정착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정부는 반공포로들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반공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농업 개발 등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일랴 다스 플로레스의 수용소에 입소한 반공포로들을 위해 기독교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중개에 나섰다. 포로들 중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비교적 많았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단체들의 반공포로들에 대한 거처 및 직업 알선에 대한 노력이 통하여 18명이 상파울루 이민수용소로 이동하게 되었다. 상파울루에 도착한 18인 중 2명은 신학교에 입교하였고, 이후 일랴 다스 플로레스 수용소에 남아 있던 반공포로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알선으로 각지로 해산되었다.

중립국을 선택한 반공포로들은 브라질에 도착한 후 흩어졌는데, 대부분이 상파울루시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브라질, 일본계 여성들과 혼인한 경우가 많았고 일자리에 종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주 초기에는 언어와 문화적 차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현지 사회에 적응해 갔다. 혼인을 바탕으로 브라질에 가정을 꾸려 정착하게 된 반공포로들은 이후 한국에서 온 집단 영농 이민자들과는 간격이 생겼다. 따라서 초기에는 반공포로들과 집단 영농 이민자 간에 밀접한 관계를 맺기 어려웠다.

그러나 브라질에 거주하는 반공포로 출신들은 볼리비아를 경유한 브라질 이민을 성사시키고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여 큰 수익을 얻는 등 한인 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봉엽은 공구를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하여 브라질 중공업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주영복은 『포한사전』을 출판하였고, 한국 언론사에 브라질에 대한 다양한 글을 기고하였다. 『포한사전』은 약 8만 어휘에 달하는 사전으로, 한인 교포들의 브라질 사회 적응뿐만 아니라 한국 학생들의 포르투갈어 학습에도 기여했다. 강희동, 문명철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준희는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었다. 백영훈은 평신도 선교사로, 교육 사역 선교자로서 리우데자네이루 자카레파구아(Jacarepaguá)에 백 기술고등학교[Colegio Tecnico Baik]를 설립하였다. 백영훈은 제2차 이민을 통해 비토리아에 온 이민자들을 자신의 집에 수용하는 등 이민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임창용은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로 활동하였으며, 의대 교수를 역임했다. 임창용은 의학박사로 활동을 하였고, 김시봉은 음악가로 성가대 지휘를 하였다.

아르헨티나 1진 반공포로들은 아베니다 웰고(Avenida Welgo)에 위치한 호텔에 묵었고, 2진은 산마르틴 이 차르가스(Sam martin y Chargas)에 있는 호텔에서 숙식을 제공받았다. 반공포로 출신들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으로 서둘러 자립하고자 하여 구직 활동 후 호텔을 떠났다. 이들은 인도의 델리켄트 수용소에서 머물 당시 사진 기술 등 직업 교육을 받았으며, 스페인어 교육도 받았기 때문에 취업에 빠르게 성공하여 호텔을 떠날 수 있었다.

반공포로 1진 임익간은 약국 종업원, 한형모는 인쇄소, 박창근은 세탁소, 박상신은 자동차 종업원으로 근무했고, 홍일섭은 선반공, 장기두는 YMCA에서 근무하였다. 정재호는 이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2진 김관옥은 세탁소 종업원, 정주원은 사진관 종업원을 하다가 선장을 하였다. 조철희는 사진관 종업원, 손재하는 선원이었고 정주원과 함께 원양어선을 5년간 탔다, 이처균은 폐결핵을 앓다가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반공포로 역시 이주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현지인 또는 일본계 여성과의 결혼 등을 통하여 현지 사회에 적응했다. 반공포로 출신들은 실질적인 이민 1세대로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반공포로들은 아르헨티나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1, 2진 반공포로 출신 12명 중 최근까지 교민 사회와 교류하는 반공포로 출신은 김관옥, 임익간, 정주원 정도이다. 김관옥은 반공포로 2진으로 1965년 아르헨티나 한인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임익간은 반공포로 1진으로 화학을 전공하였고 제약회사에 근무했다. 임익간은 약국 종업원으로 일하던 당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아픈 동포들을 위해 병원 알선과 약 처방 등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후 제1대 한인회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반공포로의 중남미 이민 역사와 의의

중립국을 선택한 반공포로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반공포로 이민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잊혀지고 있는데 이는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중남미의 이민자 및 이민 사회는 6·25전쟁기의 중립국을 선택한 반공포로와 1960~1970년대 한국의 근대화·산업화 정책과 연계되어 있는 역사적 지점이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공포로들의 이민 초기의 현실은 삶의 투쟁이었고, 현지 사회와 이민 사회와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에도 직면해야만 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반공포로들의 중남미 이주는 6·25전쟁의 여파와 그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 그리고 브라질의 반공 정책과 이민 정책이 맞물려 이루어진 결과였다. 반공포로들의 이주는 한국과 중남미 간의 외교적,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남미 내 한국인 공동체의 성장은 초기에 이민 온 반공포로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반공포로들의 공로로 중남미 내 한인 공동체들은 이후 꾸준히 성장하였고, 현재는 브라질과 한국 간 우호 관계를 증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브라질 한인 이민의 역사는 2023년 60주년을 맞이했고,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의 역사는 2025년 60주년을 맞이한다. 반공포로들의 이민 역사와 그들의 삶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아르헨티나 한국인 이민 40년사』(아르헨티나 한인이민문화연구원, 2005)
  • 브라질한인이민사 편찬위원회, 『브라질한인이민 50년사』-1962~2011(교음사, 2011)
  • 정인섭, 「한국전쟁이 국제법 발전에 미친 영향: 포로송환문제를 중심으로」(『Seoul Law Journal』41-2,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00)
  • 김환기, 「남미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고향/조국의 기억: 한국전쟁기 반공포로와 근대화/산업화를 중심으로」(『한림일본학』35,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9)
  • 「[채널고정] 한민족 리포트」(『경남신문』, 2002. 6. 24.)
  • 「[이야기 한인사] 반공포로 50명은 이렇게 해서 브라질에 왔다」(『재외동포신문』, 2004. 10. 23.)
  • 「김관옥 아르헨티나 초대 한인회장 이민 50주년 자축연」(『재외동포신문』, 2007. 5. 17.)
  • 「[인터뷰] 정하원 브라질이민사 편찬위원장」(『연합뉴스』, 2011. 1. 19.)
  • 「남도 북도 싫어 아마존으로 간 그들… “이젠 조국이 자랑스럽다”」(『조선일보』, 2011. 11. 18.)
  • 「(특별기고)브라질 한국인 선교역사-2」(『남미복음신문』, 2017. 6. 15.)
  • 「브라질 이민일기(1963-2023)」(https://www.youtube.com/watch?v=W1xTHUpXvc4)
  •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https://www.diasporabook.or.kr)
  • 주아르헨티나 대한민국 대사관(https://overseas.mofa.go.kr/ar-ko/index.do?1862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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