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특별한 이야기

동해수부 홍언의 중남미 독립운동과 자금 모집 활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파나마  페루  칠레  에콰도르  자메이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원어 주소 Panamá|Perú|Chile|Jamaica
영문 주소 Panama|Peru|Chile|Jamaica
정의

홍언이 구미위원부 화교위원으로 1921년 6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파나마·페루·칠레·에콰도르·자메이카 등을 순방하며 화교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활동.

개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하던 홍언(洪焉)[1880~1951]은, 1919년 3·1운동 이후 중앙총회의 의뢰를 받아 북미 지역에서 재미 중국인[화교(華僑)]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중국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경험이 풍부한 홍언은 구미위원부 화교위원(華僑委員)으로 임명되어 1921년 6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중남미의 파나마·페루·칠레·에콰도르·자메이카 등을 순방하며 그곳의 화교들로부터 많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구미위원부에 보냈다.

홍언의 문필 활동

홍언의 초명은 홍종표(洪宗杓)이고, 호는 동해수부(東海水夫)이다. 홍언은 『신한민보』 주필을 맡아 문필을 통해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던 미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1904년(고종 41) 하와이로 이민을 와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였고, 한인합성협회의 기관지 『합성신보』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하와이에서 북미로 이주하여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으려 ‘동해수부’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1912년 중앙총회 상항지방회 회장을 맡았으며,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신한민보』 주필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10년(순종 4)부터 40년 동안 소설, 희곡, 시가, 수필, 비평 등 다양한 문예 활동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한문에 능하여 미주 지역에서 발행되는 중국 신문에도 많은 한시와 논설을 발표하였다.

북미에서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홍언은 한문과 중국어에 능통하여 주로 미주 지역 화교들을 상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발발 직후부터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재미 중국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대한인국민회에서는 홍언과 김영훈·강영각 3명을 화교위원[교섭위원 혹은 교제위원]으로 임명하였다. 홍언과 강영각은 화교위원 자격으로 캘리포니아 지역의 중국인들에게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홍언은 미국 각지에 있는 중화회관 회장과 중국 신문사의 소개장을 받아 들고 미국 서부의 14개 주를 순행하였다. 각처에서 소개장을 받고 공문을 만들어 인장을 찍고 또 의연금을 줄 만한 사람의 성명과 도록을 만들었고, 중국인들은 홍언을 믿고 의연금을 기꺼이 내주었다.

홍언은 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유타·아이다호주 등에 거류하는 중국인들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고 1920년 1월 22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3월 10일에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애국금 수합을 중지하고,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게 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총회에서는 중국인들에게 독립운동 의연금을 거두고 있던 화교위원 홍언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다.

구미위원부 화교위원 활동

구미위원부에서는 미국 내 중국가(中國街)[China Town]를 중심으로 자본력이 좋은 재미 화교들에게도 공채를 판매하기 위해 1919년 11월 7일 자로 박봉래를 ‘공채표 중국신상 발매 임시특별위원(公債票中國紳商發賣臨時特別委員)’으로 선임하였다. 박봉래는 미국에 있는 화교들에게 공채를 판매하기 위해 ‘조한독립연맹회(助韓獨立聯盟會)[The League to help the Koreans to Independence]’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공채를 판매하였다. 그는 화교들에게 공채를 발매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공채발행(公債發行) 공포문(公布文)」 1만 매를 인쇄하여 각지의 화교들에게 배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로부터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구미위원부에서는, 화교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었던 경험이 있는 홍언을 구미위원부의 화교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중국인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던 홍언은 1920년 6월 3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마약 소지 혐의로 당국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20년 7월 19일 자로 중국인들에게서 거둔 750달러를 구미위원부로 보냈다. 홍언은 1920년 7월 29일 구미위원부에 캐나다와 멕시코, 남미 지역에 있는 화교들에게서 자금을 거두자고 건의하였다. 구미위원부에서는 1920년 11월 24일 홍언을 구미위원부의 화교위원으로 정식 임명하였다. 1921년 1월 구미위원부 화교위원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마친 홍언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로 근무하게 되었다. 구미위원부는 1920년 11월 24일 자로 홍언 외에 김승제를 화교위원으로 임명하여 화교들에게 공채를 발매하고 의연금을 수금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1월 구미위원부에서는 홍언을 화교위원으로 재임명하고 캐나다 지역의 중국인들에게서 의연금을 거두는 사업을 맡겼다. 1921년 6월에는 김원장을 화교위원으로 임명하여 화교들에게 기부금 거두는 일과 공채표 발매를 하게 하였다.

페루에서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홍언은 1921년 6월 초순 미국 뉴욕항에서 배를 타고 파나마·에콰도르·페루·칠레 등 중남미에 사는 중국인들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기로 하였다. 홍언은 뉴욕에서 배를 타고 파나마로 갔고, 다시 배로 에콰도르의 과야킬(Guayaguil)에 도착하였다. 과야킬에서 다시 배를 타고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 상륙하였고, 다시 배를 타고 칠레로 들어갔다. 홍언은 1921년 8월 초순경 남미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하여, 리마 지역에 있는 ‘강주회관’, ‘용강공소’, ‘남해회관’, ‘산해관’, ‘동성회관’, ‘국민당’ 등의 화교 단체를 방문하였다.

리마에 있는 중국인들은 ‘한국지사(韓國志士) 홍언’이라고 하면서 대대적인 환영을 해 주었다. 홍언은 8월 8일 리마 중국국민당을 찾아가 한국의 국권 회복 운동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중국국민당에서는 공회의 재정으로 100원을 보조하기로 하고 권고인 2인을 선정하여 그에게 의연금 거두는 일을 돕게 하였다. 또한 페루 현지의 중국 신문에 한국이 당하는 참상에 대한 논문을 게재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널리 알렸다. 홍언이 페루에 있을 때 리마의 중국인 각 기관과 상호에서는 그의 방문을 청하였으며, 여러 단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어 주었다. 홍언은 1921년 8월 초순부터 적어도 9월까지 페루 리마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칠레에서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홍언은 1921년 12월 초순 페루에서 칠레 북부 지방에 있는 이키케(Iquique)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하였다. 이키케 중국국민당 분부(分部)로 찾아가 분부 부장 정협민(鄭俠民) 등의 간부를 만났으며, 이들로부터 칠레 은[智銀] 8,000원과 공채 2,000원을 의연받았다. 홍언은 12월 30일경 칠레 중부의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에 있는 중국국민당 분부를 찾아갔다. 안토파가스타 분부 부장 완길남(阮吉南)과 재무 겸 서기 등석(鄧錫) 등의 간부를 만나 한국 독립 의연금을 받았다. 안토파가스타에서 모금한 의연금 총액은 은(銀) 100영(零)과 칠레 화폐로 58페소였다.

홍언은 칠레 중부 지방인 탈탈(Taltal)과 남부의 발파라이소(Valparaiso)를 거쳐 칠레 수도 산티아고(Santiago)까지 갔다. 그러나 산티아고에서는 화교들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쑨원(孫文)이 북벌을 위해 재외 화교들에게 군자금을 모금하고 있어 자금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홍언은 칠레에서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포기하고 주변의 산촌 지역을 심방하고 페루로 돌아갔다.

페루 리마 부근에서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홍언은 1922년 1월 12일 페루의 리마에 도착하여 2주간 중국인들의 사무를 도와주다가 다시 북부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홍언은 페루의 북부 지방을 유력하다가 3월경 리마로 돌아왔다. 리마에서 190㎞ 떨어진 항구 도시 수페바란카(Supe-Barranca)로 가서 중국국민당 분부를 방문하여 한국을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이후 다시 리마로 돌아왔다. 홍언은 리마 인근에서 자금을 모금하다가, 3월 22일경 리마 북부의 우아랄(Huaral)을 거쳐 항구 도시인 우아초(Huacho)로 갔다. 우아초에는 페루의 독립 영웅인 호세 데 산마르틴(José de San Martín)의 유적이 있는 ‘독립관’이 있어 그곳을 관람하였다. 홍언은 우아초에서 화교 단체인 우아초화교상회를 방문하여 회원들에게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였다.

미국으로의 귀환 과정

홍언은 페루 우아초에서 독립자금을 거둔 후 배를 타고, 트루히요(Trujillo) 항구에 내려 2주일간 체류하였다. 트루히요에서도 화교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려고 하였지만, 인정이 야박하여 거금을 거둘 수가 없었다. 1922년 4월 5일경 트루히요항을 떠나, 4월 초순 에콰도르 과야킬에 도착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홍언은 “과야킬은 화인(華人)이 약 삼천(三千)이 부상(富商)이 많다고 하니 최후의 성적을 이곳에 희망”을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고자 하였다.

부유한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과야킬에서 어느 정도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부유한 화교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자금을 모집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4월 16일 에콰도르의 바바오요(Babahoyo)에서 머물다가, 파나마로 가기 위해 다시 과야킬로 돌아왔다. 4월 하순 과야킬을 출발하여 파나마로 갔고, 파나마에서 중미에 있는 자메이카에 잠깐 들렀다. 홍언은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Kingston)에 있는 중국인 프리메이슨[Chinese Free Mason]의 초청을 받았다.

자메이카에서 미국으로 귀환을 하였는데 파나마를 거쳐 뉴욕항으로 미국에 입국을 하였는지, 멕시코를 경유하여 들어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홍언은 1922년 6월 하순 뉴욕으로 들어와서 워싱턴을 거쳐, 9월 1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홍언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방법과 성과

홍언은 중남미를 1년 동안 순방하면서 화교들을 상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홍언이 화교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과 중국이 문화적·역사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양국민이 서로 도와 일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언이 중남미 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방법은 화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돈을 거둔 것이 아니라, 중국인 중 유력한 인사들이 조직한 각 단체가 스스로 협력하여 찬조금을 거두게 하는 방법을 썼다. 중남미의 중화회관 혹은 중국국민당 분부에서 홍언에게 ‘의연권고인’을 선정해 주었고, 의연권고인이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도와주었다.

홍언은 남미 지역에 전혀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의 중국인 단체에서 스스로 홍언의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돕기 위해 ‘의연권고인’을 선정하여 돕게 하였다. 홍언은 공식적으로 구미위원부의 화교위원으로 임명장을 받고 중남미 지역으로 왔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 자신의 활동상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다. 1922년 4월 6일 자로 홍언이 구미위원부에 보낸 「화교(華僑) 연금(捐金) 업무(業務) 보고(報告)」라고 하여 ‘보고 제6호’가 있다.

이로 보아 홍언은 1922년 4월 6일 이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중남미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활동 사항을 보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제6호’만 남아 있어, 홍언의 화교 자금 모금 활동의 전체를 알 수는 없다. 홍언이 1921~1922년까지 1년간 중남미를 순행하면서 거둔 독립운동 자금의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으나 중남미 순방 동안 1개월에 1,000달러 정도를 모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12개월 동안이면 1만 2000달러를 모금하였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여행 경비를 빼면, 실제적으로는 5,000달러 미만의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었을 것으로 추단된다.

홍언의 중남미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의 기록, 『동해시초(東海詩鈔)』

홍언이 중남미 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던 역사적 사실은 유일하게 『동해시초(東海詩鈔)』라는 한시집(漢詩集)에 기록되어 있다. 홍언은 중남미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면서 각 지역에서 보고 느꼈던 것을 한시로 썼으며, 『동해시초』에는 「페루독립관(秘魯獨立館)」 연작시 3수,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쓴 「리마천주교사(利馬天主敎寺)」 연작시 2수 등 총 18수의 한시가 실려 있다. 홍언 친필의 『동해시초』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동해시초』에는 중남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윤봉길·이봉창 등에 대한 한시도 함께 실려 있기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홍언, 『동해시초(東海詩鈔)』(1932)
  • 김도형,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가』(역사공간, 2022)
  • 방선주, 「홍언과 국민회」(『재미한인의 독립운동』,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 「공채표 화교 발매에 관한 의견서(1920. 7. 29.)」(『우남이승만문서』-동문편 17,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 고정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주지역 독립운동: 재정문제를 중심으로」(『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80주년기념논문집』상, 한국근현대사학회, 1999)
  • 최기영, 「미주지역 민족운동과 홍언」(『한국근현대사연구』60, 한국근현대사학회, 2012)
  • 김도형, 「홍언의 미주지역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동북아역사논총』54, 동북아역사재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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