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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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원어 주소 | Yucatán, Méxi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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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5월 멕시코로 이민을 갔던 한인 노동자들의 에네켄 농장과의 계약 노동과 독립운동 이야기.
1905년(고종 42) 5월 13일 멕시코 유카탄주에 도착한 1,033명의 한인들은 에네켄(henequén) 농장에서 4년간 계약 노동을 하고 1909년(순종 3) 5월 12일 농장에서 해방되었다. 에네켄 농장에서 해방되기 3일 전인 1909년 5월 9일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창립하여 한인들의 단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멕시코 지역에서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결성된 이후 대한인국민회 신한동지방회,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 대한인국민회 묵경지방회, 대한인국민회 탐피코지방회,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등이 결성되었다. 멕시코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였는데,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무금, 인구세, 독립 의연금, 국민 부담금 임시정부 후원금,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 각종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은 1905년에 단 한 번 있었다. 멕시코 이민의 대리인은 영국 국적의 존 마이어스(John G. Mayers)였다. 존 마이어스는 일본의 이민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大陸殖民合資會社) 부사장이었던 히나타 데루마케[白向輝武]와 교섭하였고, 이에 히나타 데루마케가 서울에 대륙식민합자회사 출장소를 설립하여 한국인 이민자들을 모집하였다. 대륙식민합자회사 한국출장소장 오니와 간이치[大庭貫一]는 1904년(고종 41) 10월 15일부터 이준혁에게 멕시코 이민자를 모집하게 하였다. 이민에 대한 제반 사항은 대륙식민합자회사가 책임지고 필요한 비용은 멕시코 고용주[농장주] 측에서 부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민 대행 수수료 역시 고용주 측에서 가족당 파운드화로 4파운드, 독신자인 경우에는 1파운드씩을 대륙식민합자회사에 지불하도록 하였다. 이준혁은 서울, 진남포, 인천, 수원, 평양, 개성, 부산, 광주, 목포, 군산, 원산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이민자를 모집하였다.
멕시코 이민자를 위한 광고는 인천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하였던 『대한일보(大韓日報)』 1904년 11월 25일 자에 처음으로 실렸다. 그 이후 1904년 12월 17일부터 1905년 1월 13일까지 『황성신문』에 일곱 차례에 걸쳐 광고가 실렸다. 멕시코 이민 광고는 멕시코를 ‘문명부강국(文明富强國)’, ‘수토극가(水土極佳)’, ‘기후온난(氣候溫暖)’, ‘부다빈소(富多貧小)’ 등의 용어를 써 가며 매우 과장하였다. 신문에 멕시코 이민 모집 광고가 실린 지 6개월도 채 못된 기간 동안에 서울, 평양, 수원 등 전국 11개 지역에서 필요한 인원이 모집되었다.
멕시코 이민 광고를 보거나 혹은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대륙식민합자회사 대리점을 찾아가서 이민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민 계약서에는 이민 경비는 고용주가 부담하며, 4년간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하고,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조건, 노동자에 제공되는 사항 등 모두 9개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은 하와이 이민과는 다른 계약 노동[부채 노동]이었다.
멕시코 이민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멕시코 이민자들을 실은 이민선은 제물포항[인천항]을 세 번 출발하였다. 첫 번째는 1905년 2월 26일에 제물포항을 출발하였으나, 멕시코 이민을 갈 수 있는 집조(執照) 혹은 빙표(憑票)를 발급받지 않은 이민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제물포항으로 돌아왔다. 이후 다시 출발하려고 하였으나 ‘천연두’에 걸린 아이가 있어 두역 예방과 해관 검사를 하느라 바로 출발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두역 예방과 해관 검사를 마친 후 1905년 4월 2일 오전 6시에 이민선이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선에 담배와 짚신 등을 싣지 않아 분란이 발생하여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담배와 짚신, 호조(護照) 등을 이민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마침내 1905년 4월 4일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1905년 4월 4일 최종적으로 제물포항을 출발한 일포드(S. S. Ilford)호는 태평양 연안의 멕시코 서남부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하였다. 일포드호는 원래 화물선이었으나 멕시코 이민자들을 태우기 위해, 화물칸을 임시로 객실로 개조하였다. 일포드호에는 한인 이민자들과 일본인 요리사들, 독일인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한인 이민자들이 제물포항을 떠나서 멕시코 살리나크루스항에 정확하게 언제 내렸는가에 대한 자료는 없다. 메리다(Merida)에서 발간되는 『페닌술라(El Peninsular)』 1905년 5월 15일 자 기사에, 한인 이민자들이 이달고(Hidalgo)호를 타고 1905년 5월 13일 오후 3시에 프로그레소항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황성신문』에 실린 권병숙의 「기서(奇書)」와 박장현의 「보고서」에 기재된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고, 또 살리나크루스항에 내린 날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멕시코에 도착한 날짜는 1905년 5월 7일이고,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린 날은 5월 10일이었다. 한인 이민자들은 살리나크루스역에서 기차를 타고 코아트사코알코스역에 도착하였고, 코아트사코알코스항에서 이달고호를 타고 5월 13일 프로그레소항에 도착하였다. 프로그레소에서 오후 8시에 기차를 타고 그날 오후 11시에 메리다에 도착하였다.
유카탄주에 도착한 한인들은 메리다로 이동하였다. 메리다 시내 들판에서 휴식을 취한 한인 이민자들은 여러 명 단위로 묶여서 에네켄 농장들로 보내졌다. 『교포역설』에는 22개 농장에 분산되었다고 하며, 농장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다. 또 어떤 자료에는 25개 농장이라고 하고, 또 다른 자료에는 34개 농장이라고 한다. 유카탄주 문서 보관소에 소장된 자료에 따르면, 1906년(고종 43) 당시 한인들은 23개 농장에서 722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었고, 가족까지 포함하면 969명이 된다. 또 22명이 사망하였고, 27명이 도주하였다고 나온다. 1908년(순종 2) 10월 2일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유카탄주에 온 한인은 총 1,085명이고, 이들은 농장주들에게 배당되어 에네켄 농장에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유카탄주지사 올레가리오 몰리나(Olegario Molina)가 소유한 농장에 가장 많은 한인인 146명이 배치되었다.
멕시코로 이민을 간 한인들이 에네켄 농장에서 주로 한 일은 에네켄의 잎을 따는 것이었다. 에네켄은 마야어이며, 섬유식물로 6년이 지나면 1년에 두 차례 잎을 딸 수 있고, 20년 정도 살아서 15년 정도 수확이 가능하며, 이후 대공이 죽는다. 영어로는 사이잘(Sisal), 스페인어로는 소스킬(Sosquil)이라는 섬유를 추출하여 밧줄이나 노끈·가방 등을 만드는 데 주로 쓰여졌다. 우리말로는 하얀 마(麻)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농장에서 일했던 한인 노동자들은 이것을 ‘어주기’, ‘어저구’, ‘어저귀’라고 불렀다. 에네켄 농장에 배치된 한인들은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집 한 채를, 단신인 경우에는 5명 혹은 6명에게 집 한 채가 주어졌다. 일용할 기구가 배급되었고, 침상 혹은 해먹(hammock)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 본격적으로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에네켄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하는 일은 세 종류였다. 하나는 에네켄 밭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일, 둘째는 에네켄 잎을 자르는 일, 셋째는 기계실에서 에네켄 잎을 씻는 일이었다. 잡초를 뽑는 일은 매커테[20㎡]에 멕시코 화폐(墨銀) 40전, 에네켄 잎을 자르는 일은 1,000엽에 50전, 기계실은 일당 매일 75전이었다. 임금은 매주 토요일에 계산되고, 일요일에는 휴식을 하였다. 한인 노동자들은 에네켄 잎사귀를 자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하루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하여 날이 저물 때까지 일을 하기도 하였다.
한인들이 멕시코로 이민 간 지 석 달 만인 1905년 7월 말 이민자들이 곤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신태규·황용성·안정수·방화중 등이 멕시코 한인의 비참한 생활을 알리는 중국인 허웨이[河惠]의 편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중국 신문 『문흥일보(文興日報)』를 상동청년회에 보내 왔다. 유카탄주 메리다에 거주하던 허웨이는 농장의 원주민들은 5~6등급의 노예로 취급되는데, 한인들은 이보다 못한 7등급의 노예로 우마(牛馬)와 같다고 하였다. 상동청년회 서기를 맡고 있던 정순만이 『황성신문』에 기고문을 쓰면서, 멕시코 한인 이민자의 노동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카탄주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을 하는 한인들을 멕시코에서는 ‘한인 쿨리[los coolies coreanos]’로 불렀다. 한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로 취급하였다. 농장에서 한인들은 에네켄 잎사귀의 단단한 밑둥을 베어 낸 다음 가시를 제거하고 잘린 잎사귀들을 50개씩 묶어 한 다발을 만들었다. 에네켄 농장의 작업 시간은 더위를 피해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42~43℃를 오르내리는 폭염은 가장 적응하기 힘든 기후였다. 작업 할당량은 하루에 50개 묶음짜리 30단의 에네켄을 자르는 중노동이었다.
멕시코의 한인들은 1905년 5월 13일 유카탄주 메리다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이날이 4년간의 계약 노동의 시작일이 되었다. 그래서 1909년 5월 12일 4년간의 계약 노동이 만료되었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노동 계약이 끝났기 때문에 한인들은 새로운 일을 찾아서 떠나야만 했다. 4년 동안 농장 밖을 나가 보지 못한 한인들은 도대체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막막했다. 게다가 스페인어를 몰랐고, 마야인과의 접촉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장에 있던 한인들은 우선 모두 메리다시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들 대부분은 4년 동안 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가지고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졌다.
유카탄주 한인들은 1909년 5월 9일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황사용과 방화중 두 명을 메리다에 파견하였다. 멕시코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창립대회는 멕시코 한인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대단히 성대한 대회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생애 처음으로 이 같은 집회에 참석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는 창립과 동시에 을사늑약 반대 시가 행렬 운동을 벌이는 등 멕시코 지역에서 국권 회복 운동의 중심 기관이 되었다. 멕시코 한인들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대한인국민회와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들의 노력을 다 바쳤다. 멕시코의 대한인국민회에서는 한인들에게 1인당 1페소의 의무금을 거두었다. 1919년 메리다지방회 소속 한인들은 3·1운동 소식을 듣고 그해 12월 1일까지 ‘21례’[소득의 20분의 1]와 인구세 등을 합쳐 약 1,000달러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냈다.
멕시코 지역에서 독립운동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은 군인 양성 운동이었다. 한인들은 군인들을 양성하여 앞으로의 독립 전쟁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멕시코 한인들 가운데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 많았다. 멕시코 한인의 숭무 의식은 1910년(순종 4) 메리다 지방에 본격적인 사관 양성 기관인 숭무학교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숭무학교는 1909년 10월경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이근영이 한인 청년 수십 명을 모아 작둔 지방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3월경에 메리다 시내에 정식으로 숭무학교를 두었다.
이근영은 숭무학교를 창립하고 청년들을 모집하여 여가 시간에 무예를 연습시켰으며, 군법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 보통 학과도 교수하였다. 숭무학교는 갑(甲), 을(乙), 병(丙)의 3개 반이 있었으며, 갑반은 5명, 을반은 22명, 병반은 6명으로 총 33명이었다. 1913년 중반부터 유카탄주의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숭무학교 생도들은 가족을 따라 각 지역으로 흩어졌다. 멕시코혁명이 일어나자 지원병을 모집하였는데, 숭무학교의 청년들 중에도 지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처럼 유카탄 지역의 경제난으로 인한 한인들의 이산과 멕시코혁명 참전 등으로 숭무학교는 사실상 폐교되었다. 이근영은 1916년 유카탄에서 동포 청년들을 모집하여 과테말라 혁명 고용병으로 참전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는 1919년 3월 9일 오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받았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멕시코 지역의 지방회에 독립선언 소식을 전보로 보냈던 것이다. 독립 선언의 소식을 들은 미주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멕시코 지역 한인들도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였다. 멕시코 한인들은 거의 매일 국민회관에 모여 3·1운동 이후의 운동 방향에 대해 토의를 계속했고 이를 지원하고자 하였다. 곧이어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는 소식도 전달되었다.
메리다지방회는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훈시를 받아 4월 15일 오후 7시 30분 대한공화국의 건설과 신정부의 조직을 축하하는 경축식을 거행하였다. 메리다지방회는 중앙총회의 포고에 따라 3·1운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1919년 5월 멕시코 각지의 파출소에는 파출소위원을 임명하였다. 유카탄에는 이영순·김기창·최정식, 탐피코에는 김익주·최창선, 엘티그레에는 김윤원, 멕시코시티에 이인여·김동현, 프론테라에는 구연철을 임명하였다. 3·1운동 이후 멕시코 한인들은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일으켰다. 푸엘토경찰소에서는 왜화배척 법령을 준행하여 일본인과 상업상 교제를 끊게 하였다. 멕시코의 한인 여성들도 1919년 6월 15일 대한부인회 애국동맹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김신경, 부단장에 김마리안나, 총무에 김사라, 서기 겸 재무에 김마리아, 사찰원에 유에스페란사를 선출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는 1919년 4월 6일 통상회의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훈시에 따라 21례를 거두기로 하였으며,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위원으로 김기창·이영순·최경식·김치일·한익권 5명을 두었다.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임시정부에서는 1919년 6월 15일 재무총장 최재형 명의로 징세령을 내렸는데, 징세에 대한 명칭은 ‘인구세’라고 하였다. 멕시코의 한인들은 북미나 하와이에 비하여 경제력이 현격하게 낮았기 때문에, 인구세 1달러를 낼 수가 없어 50센트를 냈다. 구미위원부에서는 1920년 7월 16일 김기창을 멕시코 구역시찰원으로 임명하고, 구미위원부에서 발매하는 공채표 판매와 지방위원 조직을 하게 하였다. 멕시코 한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열성만큼은 북미나 하와이보다도 더 컸다.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하여 그들이 가진 경제력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