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의 멕시코 순행과 독립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멕시코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원어 주소 México
영문 주소 Mexico
정의

안창호가 1917년 10월부터 1918년 8월까지 10개월가량 멕시코 전역을 순행하며 한인 사회의 단결과 독립운동의 기초를 마련한 활동.

개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자격으로 1917년 10월부터 1918년 8월까지 멕시코 순방을 통해 한인 사회를 안정시키고,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멕시코 유카탄주에서 에네켄 농장의 농장주들을 찾아 다니며 한인 노동자들의 노동 신용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멕시코 한인 사회의 폐습을 철폐시키고 생활을 개선시켰다. 그리고 농장 설립 자금을 모집하여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한인들을 이주시키려고 하였다. 안창호의 멕시코 방문으로 인하여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의 존재를 각인하고 단결하였다. 안창호는 멕시코의 한인 사회를 안정시키고, 나아가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는 점에서 멕시코 한인사 및 독립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된다.

안창호의 멕시코 순방 배경

멕시코의 한인 사회에서는 자신들을 지도해 줄 수 있는 인도자를 간절히 원하였다. 1917년 4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통상회의에서 중앙총회장 안창호를 청빙하기로 결정하고 안창호에게 여비를 보내어 그를 초빙하였다. 멕시코혁명의 와중에서 유카탄의 한인들은 노동 일을 찾기가 힘들어지면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이에 한인 사회에 단결력이 엷어졌으며 질서가 문란해지는 등 총체적으로 한인 사회의 정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또한 안창호가 멕시코에 순행하게 된 동기는 1917년 멕시코의 각 농장에서 노동하는 한인들이 심각한 생활난을 당하게 된 것을 알고 그들의 생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멕시코 한인들의 안창호 청빙 의연금 모집 활동

멕시코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를 초빙하기 위해 인당 10원씩의 의연금을 받기로 하였다. 당시 중앙총회장을 청빙하기 위해 멕시코 한인들이 모금했던 「여비출연 명단」[1917년 4월 1일]에 의하면, 10원씩 총 41명이 여비 의연금을 내어 총 410원을 거두었다. 이에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는 안창호를 정식으로 청빙하며 한인들이 거둔 의연금을 안창호에게 보냈다.

안창호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와 연락을 취하면서 1917년 8월 20일경 멕시코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안창호가 멕시코로 온다는 것이 확정되자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는 그를 환영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해졌다. 우선 그를 성대히 맞이하기 위해 환영식과 기타 경비를 마련하려고 1917년 8월 5일에 개최된 통상회의에서 환영비를 거두기로 하였다. 멕시코 한인들은 “환영할 준비를 예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고로 금 통상회석에 의결인 바 당석에 응연하신 동포가 30인 중 금액 200여 원에 달”하는 준비금을 거두기 시작하여, 무려 694원의 안창호 환영금이 수금되었다. 이때 『신한민보』 기사에 따르면, “재묵동포는 굉장한 대환영을 준비하였다 한다. 돈도 많이 모아 놓고 의식도 완전히 꾸며 놓았다.”고 한다.

안창호의 유카탄주 메리다까지 여정

안창호는 1917년 10월 12일 산호세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17일 마사틀란(Mazatlan)에 도착하였고, 20일 멕시코의 만사니요(Manzanillo)항구에 내렸다. 10월 26일 멕시코시티에 당도하였고, 10월 27일 멕시코시티 한인들이 안창호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안창호는 멕시코시티 한인들을 상대로 연설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그가 멕시코를 순행한 목적을 밝혔다. 10월 30일 멕시코시티를 출발하여 베라크루스(Veracruz)로 떠났고, 코아트사코알코스(Coatzacoalcos), 프론테라(Frontera)를 경유하였다. 11월 28일 프로그레소항(Progreso港)에 도착하였고, 다음 날 프로그레소항에서 기차를 타고 유카탄주의 주도인 메리다에 도착하였다. 메리다에서 안창호는 한인들을 상대로 ‘대동 일치’라는 제목으로 3시간여의 연설을 하였다.

'메리다 노동 규정' 제정

안창호가 멕시코를 순방하며 한 활동은 다음과 같이 8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대한인국민회의 의무를 담부할 것, ② 재묵(在墨) 동포가 통일 단결하여 일치 협력할 것, ③ 노동 신용 규칙을 제정하여 실행할 것, ④ 대한인국민회 법망(法綱)을 엄히 만들 것, ⑤ 해동학교를 확장하고 법률과를 전공하기 위해 멕시코시티에 공비(公費) 학생을 파견할 것, ⑥ 혼인의 폐습을 개량할 것, ⑦ 음주와 잡기를 금단할 것, ⑧ 서북 방면에 토지를 매수하여 한인들의 부락을 설립할 것 등이었다. 위의 8가지 가운데 무엇보다도 한인들의 노동 문제가 시급하였다.

당시 멕시코 한인들은 노동에 대한 신용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일을 쉽게 할 수 없었고, 노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이 향상될 수가 없었다. 안창호는 멕시코 한인들의 노동 상황을 조사하고 농장에서 추방당한 이유를 알아보았다. 이유는 순전히 노동의 신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카탄주에 도착한 안창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저귀 한 단 묶는 것이 곧 나라 일이다.”라는 말부터 시작하였다. 안창호는 한인들이 노동을 하는 유카탄주의 에네켄 농장을 일일이 찾아 다녔다. 1918년 2월 6일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는 안창호의 뜻에 따라 ‘메리다 노동 규정’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메리다 노동 규정은 전체 12개조로 구성되었고, 이 규정의 목적은 한인들의 노동 신용을 회복하고 보호하는 데 있었다. ‘메리다 노동 규정’ 가운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어저귀 천잎을 묶을 데 10잎 이상 20잎 이하를 덜 묶는 자에게는 벌금 5원을 받을 일.

제2조 매 천잎에 20잎을 묶을 때 10잎 이상을 덜 묶는 자에게는 벌금 10원을 받을 일.

제3조 어저귀 매주에 약간씩 남기도 따기로 한 주무자와의 상약을 어기고 모조리 따므로 농주의 시비가 있는 경우에는 그 경중을 따라 5원 이상 10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일.

제4조 하루 일한 중 한 묶음 이상 열 묶음 이하를 속이는 자에게는 그 경중을 따라 5원으로 10원까지 벌금을 받을 일.

제5조 이상 벌칙을 항거하는 자에게는 10원 벌금을 징수하고 또 축출한 후 해지방경찰원은 그 사건을 본지방회로 보고할 일.

‘메리다 노동 규정’을 통해 유카탄주의 에네켄 농장주들에게 한인들이 성실하고 믿음직한 노동자임을 확인시킬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 같은 규정을 실행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는 「노동 주무원 단속법」을 제정하여 실행하였다. 이 법은 “노동 주무자로 각 농장 주무원들의 약정한 노동 신용 보호 규정을 어기는 행위가 있는 때에는 벌금 10원 이상 20원 이하에 처할 것”을 법으로 정하였다. 또한 안창호유카탄에 있는 동안 에네켄 농장주들과 한인 노동자들 사이에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여 현지 동포들의 난관을 해결해 주었다.

묵국연합지방총사무소 설치 권고

안창호는 멕시코 한인들의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묵국연합지방총사무소’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유카탄주에 도착한 안창호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을 심방하고 그들에게 대한인국민회의 취지와 목적을 설명하였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한인국민회의 의무를 다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멕시코의 한인들은 안창호의 권유에 따라 ‘묵국연합지방회 설립 청원’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요청하게 되었다. 안창호메리다지방회로 하여금 ‘묵국연합지방회 설립 청원’을 하게 한 이유는, 멕시코가 중앙총회와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메리다에 각 지방의 연합 총사무소를 설립하여 중앙총회 관할하에 각 지방을 관리 감독하여 행동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취지였다.

안창호는 멕시코 지역 대한인국민회 사업을 총괄할 수 있는 멕시코 지방 총사무소를 성립시켜 교육과 산업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려고 하였다. 이 같은 목적에 따라 안창호는 멕시코의 한인들을 설득하여 자발적으로 ‘묵국연합지방회’를 성립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묵국 지방 재류 동포 대표 서현우, 베라크루스 지방 동포 대표 이건세, 코아트사코알코스 지방 동포 대표 박선일, 프론테라 지방 동포 대표 김제선, 유카탄 지방 동포 대표 김기창 등 5개 지방의 대표들이 1918년 2월 6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묵국연합지방회 설립을 청원하였다. 멕시코 한인들의 이 같은 청원에 대해 2월 13일 중앙총회에서는 첫째 각 지방회 대표자가 지방의 의결과 연명으로 청원을 할 것, 둘째 연합회 사무소의 운용 규칙을 기초하여 연명 청원할 것이라 하여, 절차상의 문제와 구체적인 내용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멕시코 한인의 주식금 모집 활동

멕시코 한인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였다. 안창호유카탄 한인 사회의 지도자 김기창과 협의하여 멕시코 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주식을 발행하여 농장을 경영하게 하려고 하였다. 멕시코의 한인들이 일정 정도의 돈을 모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토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멕시코 한인들을 이주시켜 경작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안창호는 멕시코 한인들에게 한 주에 10달러씩 2,000주를 모집하여, 그 돈으로 토지를 매입하여 멕시코 한인들의 경제적 문제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안창호는 1918년 4월까지 멕시코 화폐로 2만 4000페소의 주식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그가 유카탄에 온 지 1개월도 안 된 1917년 12월 11일경 1만 페소가 되었고, 1918년 4월까지 1만 7000페소, 그해 4월 말에는 1만 8000페소를 모았다. 2만 페소의 자본금을 거의 모집한 안창호메리다를 떠났다.

멕시코 한인의 생활 개선 활동

안창호는 멕시코 순행 중에 한인들의 생활 개선 활동도 전개하였다. 멕시코 한인 사회에는 가장 큰 두 가지의 폐습이 있었다. 하나는 조혼(早婚)하는 풍습이고, 또 하는 축첩(畜妾)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폐습을 철폐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는 9개 조의 「개량혼인법(改良婚姻法)」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안창호는 남자는 18세, 여자는 16세 이상이 되어야 혼인이 가능하다는 것을 한인들을 상대로 설득을 하였고, 결국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는 「개량혼인법」을 정하여 실행하도록 하였다. 멕시코 한인들 가운데는 축첩을 한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안창호가 재판을 하여 한 명만 데리고 살라고 처결하기도 하였다.

당시 멕시코 한인들은 벌판에 초가집을 짓고 모여 살았는데 변소가 없어 그 주변이 더러워서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에 안창호는 노동 시간이 끝나는 대로 동포들을 동원하여 남자용, 여자용 변소를 곳곳에 만들어 주었다.

안창호의 미국 회환 과정

안창호는 1918년 5월 29일 메리다를 떠나 프로그레소항에서 에스페란사(La Esperanza)호를 탔다. 5월 30일 베라크루스항에 도착하였으며, 6월 3일 탐피코(Tampico)를 심방하였다. 그리고 안창호는 미국으로 가기 위한 수속을 밟기 위해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6월 12일 이전에 멕시코시티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미국 총영사관에 가서 미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으려고 하였다. 멕시코시티에서 미국 입국 허가를 얻지 못해, 6월 말경 멕시코 중서부 할리스코주의 주도이자 제2의 도시인 과달라하라(Guadalajara)로 갔다. 안창호는 과달라하라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 가서 입국 허가를 신청하였으나, 과달라하라의 미국 영사관에서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인 노갈레스(Nogales)에 있는 미국 영사와 협의하라고 하였다. 안창호는 7월 7일 과달라하라를 떠나 마사틀란으로 갔고, 육로로 소노라주(Sonora州)의 에르모시요(Hermosillo)로 갔다. 7월 13일경 노갈레스에 도착하여 입국을 기다리다가 8월 27일에 미국 입국이 허가되어 28일 미국령 노갈레스에서 출발하였고, 다음 날인 29일 로스앤젤레스의 집으로 돌아왔다.

안창호의 멕시코 순행의 성과

멕시코 한인의 역사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순방은 최대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창호는 멕시코를 순행할 때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를 단결시키고, 노동 신용을 회복시켜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며, 교육을 의무화시키고, 질서를 세워 각종 악습을 철폐하고, 토지를 매입하여 한인 농장을 설립시키고자 하는 등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였다. 이 같은 목표를 다 성취하지는 못하였지만, 안창호는 멕시코 순방을 통해 한인 사회를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하나로 일치시켰으며, 노동 신용을 회복시켜 경제적으로 안정을 기하게 하였다. 또한 한인 사회의 생활을 개선시켰고 온갖 악습을 철폐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정립시켰다.

특히 안창호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최대 현안인 노동 신용을 회복시켰다. 그는 유카탄에 도착하자마자 한인들에게 신용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에네켄 농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농장주들에게 한인 노동자의 신용을 회복시켜 주었다. 또한 멕시코 한인들에게 농장 설립을 위한 자본금으로 2만 페소 가까이 모금하였다. 그렇지만 이 같은 농장 설립 계획은 중간에 모집된 주식금이 분실되는 등 불신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멕시코 한인들도 안창호의 멕시코 순행의 성과로 ① 단결력 증진, ② 질서 정돈, ③ 노동상 신용 회복, ④ 자유 생활과 청년 교육 발전 등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안창호의 방문을 통해 멕시코 한인들이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하였으며, 한인 사회의 문제점이 개선되어 생활상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나아가 독립운동을 후원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멕시코 한인 이민사 및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안창호, 『나의 사랑 혜련에게』(소화, 박재섭·김형찬 편, 1999)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15(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2015)
  • 「안창호 초빙을 위해 멕시코 지방회 동포에게 반포한 글 및 여비출연명단(1917. 4. 1.)」(『도산안창호전집』제5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 김도형, 「멕시코 지역 대한인국민회의 조직과 활동」(『국사관논총』107, 국사편찬위원회, 2005)
  • 김도형, 「도산 안창호의 멕시코 순행과 그 업적」(『도산학연구』13, 도산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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