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人民族産業衣類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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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
| 시대 | 현대/현대 |
| 원어 항목명 | Indústria de Vestuário da Comunidade Coreana no Bras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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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주소 | São Paulo, SP, Brasil |
1960년대 집단 영농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한 한인들이 도시 상파울루시에 정착하여 시작한 의류 제조업.
브라질에서는 의류 제조업을, ‘공들여 만들다’라는 뜻의 ‘콘펙상(Confecção)’이라 부르는데, 이를 한인 사회는 ‘제품’이라 부른다. 1960년대 초반부터 집단 영농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하기 시작한 한인들은 1960년대 중반 남미의 메트로폴리탄이라 불리는 상파울루시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들은 시내와 가까운 ‘일본인촌’ 리베르다지구(Liberdade區)의 아클리마사웅(Aclimação) 지역에 ‘한국인촌’을 형성하였다. 이때 한인들은 제품을 시작하여, 1960년대 후반부터 당시 의류 제조업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의 봉헤치루구(Bom Retiro區)와 아랍인의 브라스구(Brás區)에 진출하였다.
한인들이 브라질의 의류 제조업 메카인 이 두 지역에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외적 원인으로, 1930년대 봉헤치루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자녀들을 의사, 변호사, 판사, 교수 등의 전문직에 진출시킴에 따라 의류 제조업을 이을 후세들이 없었다. 두 번째는 내적 원인으로, 1960년대 한인들이 브라질에 투자 자본을 가져갔고, 또한 이북 출신으로 동대문과 남대문에서 ‘제품’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간간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인들은 한국 정부의 엄격한 「외국환관리법」으로 한 사람당 200달러만 가지고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메리야스를 비롯한 많은 의류를 호구지책으로 브라질에 가져가서 팔았다. 주로 상파울루 외곽에 사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옷을 팔았는데, 여성들이 가가호호를 다니면서 옷을 파는 동안, 남성들은 독일산 딱정벌레 모양의 자동차 푸스카(Fusca)에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런데 더 이상 팔 물건이 없자, 한인들은 옷을 만들기 위해, 즉 의류 제조업에 진출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자본을 투자하였다.
한인들이 이 분야에 쉽게 뛰어들 수 있었던 원인은 “포르투갈어라는 언어를 구사할 필요도 없고, 순전히 가족만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해 낼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970년대 초 기술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한 사람들 중에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 출신의 제품업자들이 더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브라질 한인 사회는 이 분야를 더욱 발전시키게 된다. 그들 대부분은 1.4 후퇴 때 군인들과 함께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로, 서울의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 혹은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제품’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남한에 머물지 않고 브라질 이민을 선택한 것은, 1960년대 당시 북한에서 남하한 사람들이 남한 사회에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브라질 이민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 최초의 공식 이민으로, 1965년 미국 이민보다 2년 더 빨리 시작되었다.
한인 사회에서 최초로 옷을 만든 사람은 만주 출신의 김수산이다. 그는 만주 태생으로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넥타이를 만들어 큰돈을 번 사업가였다. 카우사(Causa) 이민으로 1964년 브라질에 도착한 그는 상파울루시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브라질의 의류 시장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남성 겨울 잠바를 뜯어서 본을 만들고 그것을 제품화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일반적으로 상파울루는 “여름에 에어컨이 필요없고 겨울에 난방시설이 필요 없는 살기 좋은 도시”로 알려졌지만, 해발 700m에 위치한 상파울루의 겨울은 하루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아침저녁으로 매우 서늘하였다. 그 결과 시장에 내놓은 그의 남성 겨울 잠바는 ‘성공’ 그 자체였다. 이에 자신을 얻은 그는 글리세리우의 ‘한국인촌’[한인타운]에서 사는 한인 여성들에게 재봉일을 부탁하였다. 당시 일정한 소일거리가 없던 한인 여성들은, 돈을 만지게 되면서 체면을 차리지 않고 그 일에 매달렸다. 따라서 한인들이 모여 살았던 ‘한국인촌’ 아파트에서는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김수산의 성공으로, 많은 사람[김석훈, 김인배, 김상옥, ‘나가자 집’의 오 여사를 포함한 수십 명]이 서로 경쟁하듯이 ‘제품’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글리세리우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콩지 지 사르제다스(Conde de Sarzedas) 거리에 앞을 다투어 가게를 차렸다. 그 결과 이 거리에는 공장을 겸한 의류 도매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는데, 이때부터 이 도매상과 소매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물건을 파는 ‘벤더도르(vendedor)’[영어로는 세일즈맨(salesman)]라는 직업군이 새로이 생겨났다.
1. 1960년대 중반: 봉헤치루 진출
원래 브라질의 여성 의류업계는 봉헤치루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 영역과 브라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인의 영역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한인들은 이 지역에 진출하여, 1970년대에는 생산과 유통 부문을 장악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한인들에게는 한국에서 가져간 투자 자본이 있었으며, 또한 자기들의 수준에서 가족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그리고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에서 ‘제품’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한 것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2. 1970년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한 불법체류자들
불법체류자들은 브라질 사회와 재브라질 한인 사회에 커다란 짐이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팽창을 거듭하고 있던 한인 사회의 노동집약적인 제품업에서 값싼 노동력을 의미했기 때문에 한인 사회의 경제성장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즉 브라질 사람이 보기에 ‘노예’와 다름없던 값싼 동족의 노동력은 의류 제조업 부문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힘을 축적하게 하여 ‘제품’을 더욱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불법체류자들의 존재는 한인 이민 사회 초기부터 갈등의 요소였지만, 역설적으로 ‘제품’ 분야의 경제적 측면에서는 협동과 단결의 요소로서 작용하였다.
브라질 한인 사회는 지금까지 여러 번 브라질 정부의 불법체류자 사면 혜택을 받았다. 그중 1980년의 사면은 브라질 경기침체로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기반을 잡은 한국인들의 미국으로의 재이민 현상을 부추겼고, 1988년의 사면은 1990년대 중반까지 봉제업과 단추 찍는 일에 종사하던 한인들 대신 볼리비아 불법체류자들로 대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때부터 한국 제품업계와 볼리비아 봉제업자들 사이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처럼 타민족과의 마찰은, 과거 1970년대 한인들 사이의 갈등과는 비교되지 않게, 브라질 한인 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3. 1980년대: 1.5세 흡수로 ‘제품’의 전성기
1980년대 여성 의류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또 다른 원인으로는 브라질에서 정식으로 교육받은 대학 졸업자들이 자기들의 전공과는 관계없이 제품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1,000%가 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그들이 여성 의류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전문직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여성 의류업이 한창이던 1980년대 중반 전문직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이 결혼과 함께 양가의 도움을 받아 이 업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들의 제품업계로의 업종 전환은 그동안 원심력으로 작용하던 한인 1.5세 엘리트들의 한인 사회로의 흡수를 의미하였다.
당시 이러한 현상을 브라질 한인사회는 브라질 사회로의 진출이나 교포 사회의 다양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브라질 사회와 언어에 능한 한인 1.5세 엘리트들이 여성 의류 제조업을 한인 사회의 중추 산업으로 확장·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일부 한인들의 대담한 행보[당시 저평가되었던 봉헤치루의 후아 프로페소르 롬브로주(Rua Professor Lombroso)로의 진출과 건물 매입]는 오늘날 이 거리를 브라질의 고급 패션을 선도하는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참고로 1990년 기준 브라질 한인의 수 3만 5000명 중 상파울루시에 거주하는 한인이 90%, 그리고 그들 중 98%가 이 분야에 종사하였다.
최근까지 후속부대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브라질 땅에 발을 디디면서 처음 시작하는 일은 벤더로, 세일즈맨이라는 뜻의 중개상인 역할이다. 그들은 의류 생산업자와 소매업자 사이를 왕래하며 소매업자에게 물건을 대주고, 의류 생산업자에게 ‘발리(vale)’라고 하는 일종의 약속어음과 같은 것을 받아다 주며 ‘제품’의 메커니즘을 익히게 된다. 약 1년 동안 이 일을 하면 약간의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다음 단계인 단추 기계나 재봉틀 2~3대를 마련하여 봉제(縫製)공장을 차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소규모 가내수공업 형태로, 브라질 노동자 3~4명을 고용하여 1~2년 동안 일을 하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한인들은 마지막 단계인 자신의 가게를 소유하게 된다. 물론 불법체류자로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친척이나 친지의 이름을 빌려서 가게를 차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한인들이 한 가지 일에 종사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일을 옮겨 가며 하는 까닭은, 각 단계마다 취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의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인 교포 사회 내에서는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그 사람이 언제 브라질에 도착했는지, 그리고 그동안 자본을 어느 정도 축적했는지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한인 사회 내에서는 직업에 따른 편견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10년 동안 한 가지 일, 예를 들면 단추일이나 혹은 봉제일만 했다면 그 사람은 무능력자로 치부되었다. ‘제품’ 업계에서는 직업을 단계적으로 변화를 시키는 것이 정석(定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인들의 이러한 가치판단과 사고방식은 그들 사이에 직업적 귀천의식이 존재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브라질 한인들의 경제활동 영역은 1990년대 이전까지 원사(原絲)나 직물(織物) 제조 등의 원자재 생산[예외의 경우는 한형석 대표가 운영하는 SEIKI]이나 또는 직물의 염색 분야에는 진출하지 못하고, 단지 의류 봉제업과 유통업에 국한되어 있었다.
1980년대 여성 의류업이 발전하게 된 또 다른 원인으로는 브라질에서 정식으로 교육받은 대학 졸업자들이 자기들의 전공과는 관계없이 제품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연 1,000%가 넘는 초인플레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그들이 여성 의류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전문직 종사자들의 수입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여성 의류업이 한창이던 1980년대 중반 안과 의사 이영순이 의대를 졸업하자 주위 사람들이 “의사 자격증은 화장실에나 갖다 걸고, 봉헤치루로 진출하라.”라고 충고할 정도로, 전문직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이 결혼과 함께 양가의 도움을 받아 이 업종에 종사하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 브라질 한인 사회에 존재하던 불법체류자들은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즉 한편으로는 한인 사회의 갈등의 원인이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품의 성장을 이끈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0년대 브라질은 ‘잃어버린 10년’으로, 경제는 몹시 불안정하여 인플레이션이 연 1,000%가 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브라질 한인 사회는 달러를 기반으로 하는 ‘계’를 조직하여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앞세운 페르난두 아폰수 콜로르 지 멜루(Fernando Affonso Collor de Mello) 대통령의 1990년 6월 23일 시장개방은 한국 기업들의 브라질 진출과 무역의 증대로, 브라질 한인 사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 한국과의 무역 증대
1990년 브라질의 시장개방을 계기로, 많은 한인 남성이 한국과의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이는 한국 기업의 진출과 맞물려 일어났던 현상으로, 한국과의 학연이나 지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재브라질 한인 사회에 나타난 또 다른 현상은 제품업자들 중, 한국 섬유를 브라질로 수입하기 위해 한국으로 역이민하는 사람들도 나타났고, 또한 반대로 상파울루 주재 한국 기업의 지사로 파견됐던 주재원들이 브라질에 정착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개방 초기 한국인들이 수입한 품목은 주로 제품과 관련 있는 원단과 제품에 들어가는 부속품, 값싼 전자제품, 그리고 부드러운 천이나 털실 느낌의 천으로 만들어진 동물 인형 등이었다. 이 시기 한인 남성들은 브라질-한국 무역은 물론, 브라질-미국 무역, 더 나아가 브라질-중국 무역으로 확대·발전시켰다. 그런데 이들의 무역 증가는 재브라질 한인 사회의 제품업계를 몇 단계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역과 관계된 통관 서비스 업체의 수도 증가하였다. 즉 개방 시대 한인 남성들은 그동안 여성 중심의 제품업계에서 보조자의 역할을 뛰어넘어, ‘제품’을 더 큰 규모로 확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인 남성들은 그동안 제품의 특성상 미미했던 가장의 역할을 회복하여, 남성으로서의 정체성도 회복하게 되었다.
2. 업종의 다양화, 계층 분화, 그리고 지방으로의 이주
브라질 정부의 시장개방 정책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계기가 되어, 이민 30년의 역사를 가진 재브라질 한인 사회의 직업 다양화와 계층 분화를 가속화시켰다. 따라서 브라질로 새로 들어온 불법체류자들이나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제품에 실패한 사람들은 봉헤치루에서 소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업종으로 전환하거나 다른 주(州)의 도시로 이주하였다. 이때에 이전에는 재브라질 한인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밑반찬이나 김치를 만들어 파는 반찬 가게, 한국식 빵을 만들어 파는 빵집을 겸한 미니 슈퍼마켓, 정육점이나 생선회를 포장해서 파는 식품점, 식당, 떡집, 전자제품 수리, 구두수선 점포, 미장원 및 이발소, 사진관, 노래방, PC방, 골프연습장 등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등장한 ‘이비우나(Ibiuna) 골프장’은 오늘날 한인들의 주요 사교 및 스포츠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3. 한인 ‘제품’의 ‘고급화’
재브라질 한인들의 거주지가 봉헤치루로 이동하면서, 2010년 봉헤치루의 거주 인구는 약간 증가하여 약 3만 명이 되었다. 당시 재브라질 한인 사회는 브라질 직물 생산의 40%를 담당하고 있고, 봉헤치루 상권의 65%[2,000개의 가게 중 1,300개]와 브라스 상권의 33.3%를 장악하고 있었다. 브라질 이민 전문가이자 사회역사학자 오스왈두 투르지(Oswaldo Truzzi)는 “한국인들은 누구의 밑에서 고용되어 일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스스로가 중소기업의 주인이 되어, 브라질 사회에서 고용을 창출[직접 고용 4만 명과 간접 고용 10만 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 이민과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르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2009년 외교통상부가 발표한, 재브라질 한인들의 직업별 구성[자영업[76%], 학생[13%], 전문직[1%], 기타[10%]]이 뒷받침하고 있다.
오늘날 한인들의 제품이 20년 전과 다른 점은 ‘고급화’이다. 즉 1980년대 한인 10명 중 8명이 제품을 하면서 박리다매로 좀 더 값싼 옷을 만들고자 했다면, 현재는 10명 중 6명이 세계 최신 모델을 카피하여 고급 옷을 비싸게 공급하고 있다. 즉 고급화 전략에 따라 제품에 종사하는 일부 한인은 1998년 브라질의 IMF 재정위기가 오기 직전까지 세계 패션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고 자기들이 만들 물건의 샘플을 구하기 위해 1년에 1~4번 유럽의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물론, 미국의 뉴욕과 로스엔젤레스, 그리고 한국을 여행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브라질이 남반부에 있기 때문에, 계절적으로 북반부와는 6개월의 시간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4. 봉헤치루: 미국의 자바시장을 능가하다
재브라질 한인들은 한국 사람 특유의 부지런함과 감각으로 21세기 들어 자신들의 생활 터전인 봉헤치루를 세계 제1의 원단 소비 시장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자바시장 규모를 초월한 것이다. 원래 자바시장은 1980년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거쳐 미국으로 재이주한 한인들이 형성한 곳이다. 자바시장이 짧은 기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흑인과 백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블랙 앤드 화이트 마켓(Black and White Market)’을 성공적으로 형성해 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봉헤치루도 자바시장과 마찬가지로 이에 성공하여,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지속적인 수요 창출과 또한 고급화 정책으로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20년 넘게 한국의 원단을 세계 시장에 판매하는 회사 ‘텍스-오아시스(Tex-Oasis)’의 김형선 사장은, 봉헤치루 시장이 자바시장을 능가한 원인을 브라질 한인 사회의 ‘꾸준한 젊은 피 수혈’에서 찾고 있다. 이는 브라질 한인들의 제품업계에서의 ‘제2세 체제 확립’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브라질 한인 사회의 변화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첫째, 1990년대까지 브라질 한인 사회에서 제품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로 50대 전후의 이민 1세대들이었다. 브라질의 경제정책과 교육제도에 비관적이었던 그들의 최대 관심은 ‘2세 교육’이었다. 따라서 1980년대에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한인들은 자녀들을 도시 상파울루에 있는 미국 중·고등학교에 보내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대학은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 브라질 한인들이 언제나 미국으로의 재이주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1990년대 미국 경제의 침체로 자바시장의 규모가 축소되었던 반면, 브라질은 시장개방 정책과 1994년 헤알 정책으로 인하여 오히려 ‘자금이 자본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후자인 1994년 헤알 정책은 달러 대 헤알의 환율을 일대일로 2002년까지 인위적으로 유지하며 브라질의 화폐 가치 상승을 유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브라질 한인들은 더 이상 브라질의 화폐를 달러로 환전하여 해외[미국이나 중국, 그리고 한국]로 송금하지 않고, 브라질 은행과의 정상적인 거래를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1999년 1월 브라질 경제위기는, 브라질 한인 사회의 빈부의 차를 더욱 벌여 계급화 현상을 보였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들이 미국으로 재이주했던 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이 브라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좋은 예는 한인들의 부동산 투자[주택과 상가 매입]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미국으로 재이주했던 한인들을 다시 브라질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 도매와 소매 겸업 현상
2000년대 이후 한인 상가의 또 다른 특징은 도매와 소매의 겸업이다. 봉헤치루와 브라스에 위치한 한인 상가의 약 80%가 소매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이전에 도매와 소매를 연결해 주던 ‘벤더’의 존재가 2004년부터 급감하였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브라질 한인 사회 제품업자들 사이에 경쟁을 부추겼다. 따라서 한인들의 수입은 출혈 경쟁과 박리다매로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제품의 규모가 제법 큰 한인 의류 제조업자들은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여러 지역에 소매 가게를 차려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KBS의 프로그램 「성공시대」에 나온 이원규의 경우에는 ‘Seraffina’라는 이름으로 브라질 전 지역에 소매 상점 100개를 오픈하였다]. 생산업자가 직접 소매상점을 운영함으로써, 그동안 소매업자들에게 가던 이익을 도매업과 소매업 양쪽에서 취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상표를 브라질 전국에 알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 한인 의류 제조업자들은 브라질 TV의 드라마인 「텔레노벨라(telenovela)」의 여주인공들에게 의상을 협찬하기도 하였다.
2. 1.5세와 2세 출신의 의상 디자이너 증가
최근 브라질 한인 사회의 제품업계에는 패션에서 실력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즉 과거 이민 1세대가 주먹구구식으로 제품을 했다면, 2세대들은 전문적으로 의상이나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훨씬 더 체계적인 전문가로 성장한 것이다. 이민 초기 한국 부모들은 무조건 자녀들이 의사나 엔지니어와 같은 전문인으로 교육·성장시켰다. 그러나 1.5세들은 1980년대 브라질의 경제 침체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신들의 전문 분야를 떠나 부모들이 종사하는 제품업에 흡수되었다.
오늘날 제품업계의 ‘젋은 피 수혈’은, 과거와 달리 처음부터 제품업계 진출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최근에는 산타 마르셀리나(Santa Marcelina)나 아녬비 모룸비(Anhembi Morumbi)와 같은 전문 패션스쿨이나 미술대학에서 디자인이나 의상을 전공하는 젊은 한인 학생들이 증가 추세인데, 그들은 대학 재학 중 제품업계에 뛰어들어, 중국까지도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것은 재브라질 한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3. 제품 규모 확대: 다양한 분야의 한인 2세 전문인 흡수
오늘날 제품의 규모가 커지면서 모든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이란, 제품업의 성격상 미술이나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는 물론, 품질관리 및 마케팅에서도 변호사와 회계사를 필요로 하는데, 최근에는 한인 2세들이 그 자리를 채워 가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제품업자는 자녀들과 일하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늘날 제품은 예전의 제품과는 그 성격이 완연히 다릅니다. 1970년대 중반 제가 처음 이민 왔을 때만 해도 말과 글을 모르니까 아내와 함께 그저 열심히 옷만 만들었어요. 그러나 오늘날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아이디어나 정보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 분야에서 정보를 얻지 못하면 이 ‘살벌한’ 제품업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보라고 하는 것이 옷을 만드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옷을 판매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제품업은 어떤 개인보다는 조직이 시스템을 갖추어야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저는 진작부터 한인 1.5세 전문인들을 영입하여 제품 생산과 유통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장성한 저의 자녀들도 영입하여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브라질 직원들과 일하면서 항상 이들이 과연 내가 하는 이야기를 100%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브라질 땅에 살고 있는 이민 1세대가 갖는 공통 문제일 것입니다. 어쨌든 저의 경우, 자식들과 일하게 되면서 특히 법대 출신의 아들과 함께 일하게 되면서,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언제나 나중에 어떠한 손해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즉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제 자식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면서, 사업을 좀 더 폭넓고 크게, 그리고 빠르게 진행할 수 있게 되어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1986년 민정이 들어선 이후 일곱 번째 경제 정책인 1994년 ‘헤알 플랜(Plano Real)’[달러 대 헤알을 일대일로 묶어 둠]으로 브라질 화폐가 안정되었다. 그동안 브라질은 한인들이 미국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 역할을 했지만, 화폐가 안정되자 한인들은 주택이나 상가 등의 부동산에 투자하며 정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찌감치 자본을 축적한 일부 ‘성공한’ 한인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봉헤치루의 중심 거리인 후아 조세 파울리누(Rua José Paulino)의 두 번째 평행길인 프로페소르 롬브로주 거리의 건물들을 하나씩 구매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자녀들은 후아 조세 파울리누와 프로페소르 롬브로주 거리 사이에 있는, 후아 아이모레스(Rua Aimorés)로 진출하여 서울의 청담동처럼 유행을 선도하는 고급 의류를 선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헤치루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대인 지역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제7일 안식교회[Adventista]가 프라치스 거리의 10년 이상 비어 있던 유대인의 성소 건물을 매입했는데,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제7일 안식교인들은 자신의 교회 역시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설득에 성공했다고 한다.
‘제품’은 오늘날 브라질을 포함한 중남미 한인들의 민족 사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브라질의 경우 ‘제품’은 1980년대 중반 한인 사회의 사회의 중추 산업이 되었다. 그런데 1990년 브라질 정부의 시장개방 정책은 한인 사회의 제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즉 한인 사회 ‘제품’의 성격과 특징이 달라졌는데, 그것은 한인들이 의류 시장을 좀 더 확대하기 위해서 후세들을 미술대학교나 패션스쿨에 진학시킨 것이다. 따라서 미술이나 패션을 전공한 이들 한인 후세들은 2000년대 전문화와 고급화를 추구하며, 오늘날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의류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브라질 한인 사회의 경제 규모는 1997년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1998년 브라질의 IMF 사태와 2008년 미국발 세계 재정 위기[리먼 브라더스 사건]로 브라질 한인 사회의 의류 제조업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브라질 경제가 2013년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침체하면서, 한인 사회의 중추 산업인 의류 제조업도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한동안 봉헤치루가 폐쇄[Lock Down]되어 그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한인 사회는 브라질의 의류 시장 규모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커질 것이라 기대하며, 여성 의류의 전문화 및 고급화 전략을 통해 브라질의 의류 시장을 이웃 국가인 파라과이, 볼리비아, 그리고 아르헨티나까지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