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특별한 이야기

초기 중남미 한인 비즈니스, ‘보부상 벤더’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주소 Paraguay|Brasil|Argentina
정의

파라과이를 비롯하여 중남미 한인들이 이민 초기부터 주로 하였던 상업 활동.

개설

벤더업은 동사 ‘Vender[팔다]’에서 유래하였으며, 집집마다 방문하여 물건을 팔고 주 단위로 수금을 하는 할부 판매 방식의 사업이다. 파라과이에 이민을 간 한인들 대부분이 벤더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벤더의 시작

1960년대와 1970년대 남미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 중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했던 이북 실향민, 제품업을 운영했거나 종사했던 기술자가 포함돼 있었다.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한국 정부는 1962년 3월에 「해외이주법」을 만들었고 이민 사업을 추진하였다. 6·25전쟁 이후 발생한 잉여 인구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62년 12월부터 1966년까지 남미로 집단 영농이민을 계속해서 보냈으며 1966년부터 1968년까지 가톨릭 영농이민, 1971년에는 기술이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77년에 이민을 제한하는 5·4 조치가 내려졌다.

1960년대 중반부터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로 영농이민을 간 한인 이민자들은 생계 유지와 자녀의 교육 문제로 황무지와 밀림을 개간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도시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자본이 없는 상태로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하여 이민선에 싣고 온 살림과 옷, 생활용품들을 판매하였다. 이들은 가방을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지고 가정집을 찾아다니며 팔았기에 보따리 장사라고 불렀고, 방문 판매 혹은 행상은 생계 수단이 됐다.

이렇듯 벤더는 이민 초기에 타지에서 생활 터전을 마련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한인들이 상업이나 의류업에 진출하자 행상을 다녔던 중간 상인을 통틀어서 벤더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벤더를 기반으로 초기 이민자들이 상업과 의류업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한인들 일부는 기술력과 관계없이 원단을 구매하여 옷을 직접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고, 의류 제조업을 ‘제품’이라고 불렀는데, 제품집에서 옷을 구매해서 집집마다 벤더를 다니거나 집단 영농이민으로 온 가족 단위의 사람들은 제봉업과 벤더를 겸하기도 했다. 한인 이민자들이 이민 가방에 가져온 한국의 물건은 품질의 차이로 현지인들을 매료시켰고, 현지에서 한인 이민자들이 생산하던 제품들 역시 인기를 끌었다. 일례로, 현지인들은 요강 및 세숫대야의 용도를 모르고 구입하였다고 한다.

벤더의 지역별 특징

브라질의 상파울루시 같은 경우에는 1920년부터 브라질의 산업 및 의류업에 기반한 경제 중심지로 발전했기에 의류 제조업 기반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반면에, 파라과이는 19세기와 20세기에 두 번의 전쟁을 겪은 나라로 물건이 귀하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다. 파라과이의 산업화와 도시화 수준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비해 낮았고 유통망이 부족했기에 파라과이에서는 벤더업이 더욱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으며 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특히 파라과이는 제3국으로 가는 교두보였기에 한인 이민자들이 파라과이로 몰려 왔다. 1970년대 파라과이의 공항은 한인 이민자들로 대성황이었고 이민 가방에 들어 있는 물건들 중 돈이 될 만한 것은 현지에서 거주하고 있던 한인이나 공항 직원들의 관심을 끌었다. 공항에 한국인이 쏟아져 들어오자 현지인들은 한국인이 돈이 많다고 오해를 할 정도였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예전에는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고 추운 지방이었기에 이민 초기에는 행상인 벤더보다 요코 삯일이 성행했다.

파라과이에서 벤더업이 성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현지인들이 할부 판매 방식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행상 벤더가 구매자의 집까지 물건을 가져다 줘서 편리했고, 현지인들은 당장 적은 돈으로도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는 이점이 컸다. 판매자인 벤더는 계약금의 일부를 먼저 받았는데, 남은 금액은 구매자가 정해서 일주일 혹은 보름 단위로 나누어서 지불하였다. 행상 벤더는 시내 중심가[centro]에 흩어져 있던 한인 의류 제품집에서 물건을 받아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이윤을 남겼다. 보통 물건값의 2배를 받고 팔았으나 원가에 가까운 선금만 받고 수익금에 해당하는 할부금은 떼이는 경우가 점차 많아졌다. 현지인들은 새로운 물건을 가져다 주어야 밀린 외상값을 주기도 하였다. 일부 현지인은 돈이 없어서 할부금을 갚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는 돈이 있어도 내지 않았고 수금을 하기 위해 몇 번을 방문해도 돈을 주지 않자 현지인이 키우던 돼지를 끌고 왔다는 경험담도 있다.

이민 초기에는 판매를 하기 위해 집 앞에서 사람을 부를 때 손뼉을 쳤다. 그러면 현지인들은 반갑게 맞이해 주기도 했었고 손짓으로 거절하기도 했었다. 40℃를 웃도는 날씨에 도보로, 오토바이나 버스를 타고 외곽으로 벤더를 다녔는데 현지인들은 즐겨 마시는 지역의 특산물인 차가운 마테차를 권유하거나 샤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도 했다. 반대로 벤더를 다니면서 더위에 실신을 하거나 호수나 계곡에서 몸을 식혔다고도 전한다.

1960년대의 영농이민은 가족 단위의 집단 영농이민이 대부분이었으나 1970년대 중반에는 단신으로 개인 형태의 자유 이민을 간 총각에게 제품집에서 물건을 줄 때는 재정 보증이나 계약금이 필요로 했다. 또한 먼저 이민 온 사람들은 시내에서 구매력이 있는 현지인 상대로 벤더를 다녔는데 나중에 온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구매력이 약한 사람들 대상으로 점점 외곽으로 벤더를 다녀야 했다. 그리고 파라과이는 목화솜을 재배하던 나라였는데 기계화가 되기 전까지 일꾼들이 수작업을 하는 수확 시기에 현지인들은 여윳돈이 생겨서 시장에 돈이 돌았다. 따라서 행상 벤더는 일꾼들 대상으로 판매를 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한인 이민자 대부분은 업종을 전환했다. 전문적으로 벤더업을 지속한 사람들은 중고차와 소형 화물차를 이용해 현지인 가정을 대상으로 의류와 값싼 생활용품에서 신발, 손목시계, 전자제품, 주방용품, 공사 자재류, 가구 등 다양한 품목을 판매했다.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남미 3국 중에 의류가 아닌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 벤더업은 파라과이가 유일하다. 2010년대를 전후하여 일부 한인은 현지인을 고용해서 벤더업을 했는데 현지인에게 일정 금액은 고정으로 주고 나머지는 성과급 형태로 지불했다. 2024년 기준 소수[약 100여 명]의 한인이 벤더업에 종사하는데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중간 상인 의류 벤더도 소수[30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는데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수도 아순시온에서 330㎞ 떨어진 파라과이의 제2도시인 시우다드델에스테(Ciudad del Este)에서는 초기 한인 이민자 소수가 1975년부터 오토바이와 버스로 아순시온에서 옷을 떼어다 팔았는데 젊은이들이 사고로 죽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벤더를 다닐 때는 아는 사람들끼리 지역을 나눠서 다녔다. 할부판매를 할 때는 수금 카드인 벤더카드에 구매자의 이름, 날짜, 품목, 할부 기간을 적고 서명을 받았다. 벤더를 시작할 때는 벤더카드가 50개 정도, 보통 평균 200~300개 되었는데 많게는 500개를 가진 사람도 있었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기 위해 벤더카드를 다른 상인에게 넘길 경우, 남은 할부금의 30~50%를 받고 넘겼다. 파라과이-브라질 공동의 수력발전소인 이타이푸(Itaipu) 댐의 건설 호재로, 그리고 브라질 관광객의 방문 증가로 현지인들의 구매력이 생기자 당시 수도 아순시온에서 수금했던 금액과 비교하면 물건값의 총액을 더욱 빨리 회수할 수가 있었기에 동일한 기간에 더 큰 금액을 모을 수가 있었다. 또한 이타이푸 직원들의 월급날이나 국도에서 환전을 해 주는 현지인에게는 월부가 아닌 현찰로 할인해서 판매하였다. 파라과이는 더운 나라이지만 지퍼와 소매가 달린 잠바가 좋아 보여서 지나가면 옷을 달라고 불렀다고 한다.

파라과이의 학자들은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경제활동이었던 벤더와 아순시온 시내 곳곳에 식료품점을 운영해 쉬는 시간 없이 저녁 늦게까지 가게를 운영했던 상행위는 현지 시에스타(siesta) 문화를 없애는 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벤더를 통해 현지인들에게 옷과 같은 재화 혹은 상품을 제공함으로써 빈곤층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계층 간 차이를 좁힌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벤더의 시기별 특징

초기의 한인 이민자 대부분은 벤더업과 의류업에 종사하여 의류업을 발전시켰다. 그뿐 아니라, 벤더업은 이민 생활 중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거나 소자본으로도 경제적 활동을 가능케 했던 업종이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민 초기 보따리 장사였던 벤더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제품집에서 옷을 구매해 현지인 가정과 옷가게를 대상으로 방문판매를 했으며, 도보로 혹은 버스로 다녔다. 제품집에서 옷을 만들어서 넘기면 벤더는 지방 구석구석을 다니며 판매를 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인 이민자들은 상파울루시 봉헤치루, 아순시온의 사시장, 부에노스아이레스 자치시의 온세 의류 상가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인들이 생산하는 옷은 유대인과 현지인 소유의 옷가게에서 판매하는 가격보다 저렴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의류업의 규모가 팽창해 도소매업자를 연결해 주는 행상 벤더가 경제활동을 이어 나갔는데 고용 형태가 아닌 자의적으로 중간 상인 역할을 했던 의류 벤더는 옷 가게 대상으로 제품에 가격을 메기고 마진을 남겼다.

2000년대까지 한인 의류 판매업자들은 상파울루의 브라스, 아순시온 사시장보난사, 아르헨티나의 아베야네다 상가를 포함해 현지의 상권 절반 이상을 점유했을 정도로, 한인들이 운영했던 점포의 수는 나라와 지역에 따라 최소 350개부터 최대 3,000개나 되었다. 그리고 한인 의류 판매업자들이 도소매업을 겸하게 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 사이 벤더는 없어지다시피 했다. 1997년부터 아르헨티나의 일부 한인 도매상은 재고를 처분하기 위해 이동식 시장인 페리아(Feria)에 진출하였다. 2000년을 전후해 브라질 한인의 극소수는 지방의 지역축제 혹은 페이라를 찾아다니며 판매하였고, 이후에는 다른 도시로 진출해 판매 활동을 하였다.

참고문헌
  • 파라과이한인회, 『파라과이 한인 이민 35년사』(한국교육평가원, 1999)
  • 박민영 외, 『기록으로 보는 재외한인의 역사』-이주와 정착 그리고 발전의 시간들: 아메리카(행정자차부 국가기록원, 2016)
  • 전경수, 「아르헨티나의 한국이민: 형성과정과 분포경향」(『이베로아메리카연구』1, 서울대학교 스페인중남미연구소, 1990)
  • 서성철, 「라틴아메리카와 한국인 이민: 아르헨티나 한인사회와 현지적응」(『라틴아메리카연구』18-3,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2005)
  • 최금좌, 「재브라질 한인사회와 문화정체성」(『디아스포라연구』6-1, 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2012. 6. 4.)
  • 박진영, 「파라과이-브라질 국경지역 한인 이민자의 정착과 문화교류에 관한 연구: 국경도시 ‘시우닷 델 에스떼’의 한인사회(1975-2023)」(한국외국어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4)
  • 박진영, 「파라과이의 한인사회: 수도 아순시온과 국경도시 시우닷 델 에스떼의 비교분석」(『재외한인연구』64, 재외한인학회, 2024)
  • 인터뷰(파라과이 한인회 고문 및 남미동아뉴스 발행인 임광수, 2024. 3. 31.)
  • 인터뷰(파라과이 시우다드델에스테 거주 재외동포 박종호, 202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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