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문화·교육/교육 |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 지역 | 브라질 |
| 시대 | 현대/현대 |
| 원어 주소 | Bras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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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 주소 | Brazil |
1960년대 이민 초기부터 현대까지 브라질 한인의 교육 현황.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최대 관심은 경제 문제와 자녀 교육 문제였다. 전자는 어떻게 브라질에서 먹고살 것인가의 문제였고, 후자는 이민의 동기 중 하나인 자녀들의 농촌에서의 삶과 브라질 농촌 지역에서의 교육 수준을 보고 절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 농장이나 서울 농장 사람들은 대부분 자녀들이 상파울루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집을 마련해 주며 두 집 살림을 하였다.
1960년대 농촌에서 생활한 한인 1.5세 대부분은 제 나이에 맞는 학년을 놓친 까닭에, 도시로 이주한 이후 ‘마두레자(madureza)’라는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하였다. 박선관의 『상전벽해』에서는, 세 자녀가 밀가루 포대 자루를 뒤집어쓰고 맨발로 집에서 멀리 있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 모습을 보고 피눈물이 났다고 했다.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도 못하고, 학교의 교육 수준 또한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농촌의 학교 선생님은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1990년 브라질의 문맹률은 96%였다]. 따라서 박선관 역시 대부분의 한인 농업 이민자들처럼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도 도시 상파울루로 이주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원래의 계획에 따라서, 어느 정도 농촌 생활에서 성과를 거둔 이후 상파울루시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백옥빈을 비롯한 한인들은, 1956년 반공포로로 브라질 땅을 밟은 문명철 목사의 도움으로, 자녀들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문명철 목사가 한인 후세들의 학교 진학 문제를 앞장서서 돕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초로, 김덕원의 고교 입학과 고은희[백옥빈의 딸]를 비롯한 다섯 명의 여학생을 상파울루 시내 산투아마루(Santo Amaro)에 있는 미국 여전도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외에도 브라질에 도착한 지 6개월 만에 상파울루대학교[USP] 상대에 입학한 김정남과 제툴리우 바르가스 대학교[FGV] 경영대학에 입학한 송영운의 경우도 있다. 김정남은 서울에서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대 재학 중 1966년 부모를 따라 브라질로 이민을 했는데, 선상에서 포르투갈어를 독학으로 익혀서 다른 한국 이민자들에게 포르투갈어를 가르쳤다[1980년대 후반 광고지 『뉴스브라질』 대표]. 그리고 송영운이 제툴리우 바르가스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당시 『교민회보』는 이를 대서특필하며 기뻐하였다. 그는 나중에 김철언이 주도한 한브교육협회의 이사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브라질협의회 회장으로서 한인 사회에 기여하였다.
그런데 1960년대 한인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열의와 희생에 대해서,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미다할아버지 장승호조차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민 초기 한인들이 집을 얻을 수 있도록, 집세를 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보증을 서는, 피아도르(fiador)를 해 준 유일한 사람으로, 당시 한인들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형편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당시 한인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희생을 보고, “왜 밥을 굶으면서도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느냐? 왜 어려운 생활 중에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하느냐? 이것은 허영이다. 그리고 낭비이다.”라며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인플레이션이 촉진되던 1980년대에는 브라질의 최고 대학[의과대학 포함]을 나온 엘리트들이, 브라질 직장을 그만두고 부모나 형제가 하는 한인 사회의 중추 산업인 ‘제품’에 뛰어들었다. 브라질이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되는 1980년대 중반, 불안정했던 경제 변화로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은 브라질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1세대와는 달리 포르투갈어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민정 수립 이후 시작된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일곱 번의 경제정책의 파고를 이겨 내며 한인 사회의 경제 규모를 키워 냈다.
그런데 이때 한인 사회에 나타난 교육 현상은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자녀들의 ‘한글 교육’과 ‘한인으로서의 정체성 강화’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들을 학비가 매우 비싼 브라질의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나 외국인 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대표적인 것이 토요 한글학교이었다. 브라질 성 김대건 순례지 한인 성당이 운영하는 대건한글학교와 각 교회가 운영하는 한국학교가 총 37개나 되었다. 그중 ‘쌍빠울로 한국학교[Escola Hanguk de São Paulo]’는 전성기 때 교사의 수 30명에, 학생의 수가 850명에 달할 정도로 가장 큰 규모의 한국학교였다. 그런데 파라과이에서 전일제 한국학교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브라질 한인 사회에서도 전일제 한국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결과 1998년 봉헤치루에서 브라질 한국학교 폴리로고스(Polilogos)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쌍빠울로 한국학교’가 전신이다. 즉 김철언을 따르는 약 40명의 1.5세 엘리트들이 회원인 한브교육협회가 주축이 되어, 한인 사회와 한국 정부가 각각 50 대 50으로 투자하여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있는 학교로 개교하였으나 운영상의 미비로 2007년 폐교하였다.
후자의 경우,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자녀들을 브라질 최고의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에 보냈다. 그리고 대학은 미국이나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는 1980년대 남미인의 북미[미국이나 캐나다]로의 이주 물결에 힘입어, 한인들도 그 물결과 함께 재이주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참고로, 상파울루 시내에서 동양인이 가장 많이 다닌다는 반데이란치스는 대학 입시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학교 가운데 하나인데, 그중 15%가 한국인이었다[1998년 기준]. 당시 그곳의 마우로 아기아르(Mauro Aguiar) 교장은, “중산층의 한인 학부모들은 매달 720헤알[약 300달러]의 수업료를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자녀가 브라질 최고 대학에 다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한인 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브라질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데, 그들의 전공은 주로 생물학이나 이공계입니다.”
따라서 당시 브라질 한인 사회에서는 “일본 이민 사회의 경우 그들이 자녀들을 대학교에 보내는 데에 60년이 걸렸지만, 한국 이민의 경우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이는 한국의 브라질 이민이 1960년대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즉 시기적으로 브라질의 산업화 및 도시화 현상과 맞물려서, 한인들이 농촌에 정착하지 않고 상파울루로 재이주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브라질 최고의 상파울루대학교는 1992년 한국 국적의 학생 수를 143명으로 발표했는데, 이는 등록된 외국계 학생 중 가장 많은 숫자였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일본계나 그 밖의 다른 인종의 후세들이 브라질 태생으로서 브라질 사람으로 통계가 잡혔기 때문이다.
한인 이민 50주년을 맞이한 2013년 브라질 한인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그동안 한인 사회가 배출한 전문인은 의사 200명, 변호사 100명, 판사 7명, 검사 4명, 그리고 대학교수, TV 앵커, 영화감독 등으로, 한인 1.5세나 2세들의 전문 분야로의 진출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한인 사회 자녀 교육의 특징은, 이전의 의사나 변호사 등의 전문 직업보다는, ‘제품’ 업계에서 대를 이을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녀들을 산타 마르셀리나(Santa Marcelina)나 아녬비 모룸비(Anhembi Morumbi) 등의 전문 패션스쿨이나 미술대학에 진학시켜 브라질 의류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문직이나 혹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자녀들이라도 수입이 ‘제품’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적기 때문에,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가업을 잇게 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나, 최근에는 자녀들이 오히려 부모들을 설득하여 가업을 이어 받고 있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이 해외에서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가업을 더욱 전문화하고 체계화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실시간 전송되는 위성방송으로 지켜본 브라질 사회가 가장 부러워한 것은 한인들의 교육열이었다. 브라질 사회는 한국 경제의 성장 원인과 브라질 한인 사회의 성공 요인을 한인 부모들의 교육열에서 찾았다. 이에 대해 제28대 브라질 한인회 회장 김철언은, 브라질 한인 사회의 ‘교육열’에 대해 브라질 언론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언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봉헤치루 한인 가게 주인의 50%는 브라질 대학 졸업자들입니다…. 사실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은 초창기 농업 이민단이 두 달이나 배를 타고 브라질에 올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배를 타고 오는 중에서도 임시 학교를 운영하였으니까요…. 그것의 근본 원인은 한국 사회가 유교 사회였다는 겁니다. 한국은 오래전부터, 아무리 가난해도 공부를 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은 자녀들은 (오히려) 가족의 부끄러움이었습니다.”라며 한인들의 자녀 교육열의 배경을 한국의 역사와 사회적 요소를 곁들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한-브 포럼’이라는 양국 고위층의 인적 교류 프로그램이 있는데, 2006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브 포럼의 브라질 측 회장 아마우리(Amaury) 전 대사는 “브라질 사회가 한국과 브라질 한인 사회에 주목하는 점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 도입할 것인지, 그리고 한국 부모의 자녀 교육열을 어떻게 배울 것인지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2015년에는 브라질의 경제학자이자 TV 평론가 히카르두 아모링(Ricardo Amorim)이 한국과 브라질의 경제발전 과정[1960~2015]을 비교하는 영상을 제작하였는데, 그동안 한국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을 ‘한인들의 교육열’에서 찾았다.
한인들의 브라질 이민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자녀들의 교육으로, 1960년대 집단 영농이민자의 인근 도시로의 이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브라질 정부의 시장개방 정책으로, 즉 한국 원단의 수입 증가로 브라질 한인 사회의 경제 규모가 커졌는데, 이때 한인들은 자녀들을 과거처럼 의사나 변호사 혹은 엔지니어 등의 전문직에 진출시키는 대신 패션스쿨이나 미술대학에 진학시켜 ‘제품’ 업계를 전문화하였다. 이는 자녀들의 진로 변화가, 오늘날 브라질 한인 사회의 중추 산업인 의류 제조업을 더욱 전문화 및 고급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중남미는 물론이고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국가까지 시장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