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종교/기독교 |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 지역 |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쿠바 |
| 시대 | 현대/현대 |
| 원어 주소 | México|Brasil|Argentina|Cu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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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 주소 | Mexico|Brazil|Argentina|Cuba |
1905년 5월 멕시코 유카탄주 에네켄 농장 이주 때부터 시작된 중남미 거주 한인들의 개신교 활동.
중남미 한인 개신교는 이민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한국 최초의 중남미 이민은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주로의 노동 이주이다. 1,000여 명의 이민자 중에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난 개신교인들도 있었다. 노예나 다름없는 고된 노동 중에도 한인 개신교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동포들을 결집하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방회를 설립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숭무학교를 세우고, 독립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09년(순종 3) 5월 12일 농장주와의 4년 계약이 끝나자, 가정 예배를 드리던 동포들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관 내에 감리교회를 세웠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교포들은 정착한 지역에 한인 교회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친 대한민국 정부는 1960년대부터 영농 이민단을 브라질에 파견하였다. 1963년 12월 12일 브라질 산투스항에 도착했던 113명의 영농이민단은 1964년 최초의 한인 교회인 기독교연합교회를 설립하였다. 파라과이에서는 1965년 시작된 공식 이민에 앞서 선교사 최재윤과 한성욱이 입국하여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정착을 도왔다. 1964년 입국한 한성욱은 한인들이 도착한 아레구아에 최초의 한인 교회를 세웠고, 현재 이름은 한인연합교회이다.
아르헨티나 이민은 1965년 78명의 영농이민단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입국하면서 시작되었고, 한인들은 1969년 제일교회를 설립하였다. 1980년대 들어 한인 이민이 중남미 전역으로 확대되고 1960년대 영농이민단이 형성한 한인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한인 교회도 체계를 잡아 가기 시작하였다. 대형 교회가 생겨났으며, 장로교가 한인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중남미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브라질의 한인 교회는 2024년 6월 기준 37개이다.
1960년대 서울 영락교회 장로 김승한이 교회를 중심으로 브라질 이민단을 모집하였고, 홍종철과 박민흥은 서울 원동교회에서 아르헨티나 이민단을 모집하고 세계기독교봉사회 한국지부를 이민 교섭단체로 하여 이민을 추진하였다. 그만큼 초기 이민단 중에는 개신교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현지어를 구사하는 데 한계가 있어 지역의 교회에는 참석하기가 어려워서 자체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한인 교회는 이민 1세대가 정착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하였고, 새로운 이민자들의 정착 및 적응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종교의 목적뿐 아니라 한인들이 친목과 교류를 통해 동질성을 찾고 한인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기능을 하였다.
한인 교회는 이민 사회와 함께 성장하였다. 그러나 현재 중남미 한인 사회는 한국어 구사 능력이 낮고 한인 네트워크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현지화된 1.5세대, 2세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한인 교회의 규모도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이민 초기에는 한국과 미국에서 목사들이 들어왔지만, 최근에는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차세대들이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어 한인 차세대들을 위한 현지어 예배를 드리거나 현지인을 포용하는 현지 교회로서의 전환도 이루어지고 있다. 볼리비아에서는 한국인 전도사 정치현(鄭治鉉)이 정치 선교를 위해 기독민주당[PDC]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