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營農移民團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파라과이 |
| 시대 | 현대/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5년 2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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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주소 | Paraguay |
| 영문 주소 | Paraguay |
| 성격 | 이민 단체 |
1965년 2월 17일 보이스벤호를 타고 파라과이로 출발한 이민단.
파라과이 영농이민단 제1진인 30가구 95명은 1965년 2월 17일 부산항에서 출발하였다. 모든 이민단이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은 아니었고 다양한 직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정부는 1963년 7월 파라과이 유엔 수석대표를 초청해 파라과이로의 한국인 이주 가능성을 확인했고, 한국이민협회 직원 2명을 파라과이 현지에 파견하는 등 파라과이 이민에 힘을 기울였다.
파라과이 영농이민단은 영농이민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의 이민 사업은 관민 합동으로 이루어져, 보건사회부에서는 이민 사업의 법적 문제와 행정 일반을 처리하였다. 한국이민협회에서는 실질적인 업무 처리 및 토지 구입, 분할 구획 정리, 배정 등을 담당하였다.
파라과이 영농이민단이 탄 보이스벤호는 부에노스아이레스항을 거쳐 1965년 4월 22일 파라과이 아순시온항에 도착했다. 초기 이민자들은 곧바로 정착 생활에 돌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센트랄주 아레구아시에 있던 아레구아(Aregua) 합숙소에서 일정 기간 동안 대기하며 생활하였다. 이후 이민자들은 주키리 농장, 카아과수 등 인근 도시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한인들은 파라과이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활동 범위를 넓혀 넓은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부의 정책 부재, 토양의 척박함과 독충 문제, 이민자들의 농업 지식 부족 문제 등으로 파라과이 영농 이민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민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벤더업[상행위] 등 다른 일을 찾아 이민자로서의 삶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