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營農移民團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브라질 |
| 시대 | 현대/현대 |
| 원어 주소 | Brasil |
|---|---|
| 영문 주소 | Brazil |
| 성격 | 이민 단체 |
1960년대 대한민국 정부가 다섯 차례에 걸쳐 공식적으로 브라질로 송출한 영농이민단.
브라질 이민 희망자들이 한백문화협회를 통해 신청한 이민 계획서와 이민자 명단이 1962년 5월 브라질 국립 이민 및 식민 연구원[Instituto Nacional de Imigração e Colonização, INIC]의 허가를 받자, 한국 정부는 1962년 3월 9일 제정한 법률 제1030호 「해외이주법」을 근거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5차에 걸쳐서 1,335명을 집단 영농이민, 즉 브라질 영농이민단으로 송출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9년 브라질과 수교하였는데, 1955년부터 재개된 일본 이민을 벤치마킹하여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국가로의 이민 송출 가능성을 타진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 이후 들어선 국가재건위원회가 ‘국가의 경제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그리고 같은 육사 출신이면서도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출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정인규 대령과 김수조가 추진하던 브라질 영농 이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성사시켰다.
1960년대 초, 한국에는 브라질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 주재 브라질 영사가 1962년 11월 한국으로 와서, 지정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마친 이민 희망자들을 면담한 이후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그 결과 1차 영농이민단 103명[7가구와 11명의 전역 군인들]이 1963년 2월 12일 산투스항(Santos港)에 도착하였고, 2차 이민 100명[24가구]이 1963년 11월 역시 산투스항에 도착하였다. 3차 이민 350명[68가구] 중 70명이 1964년 3월 15일 산투스항에 도착한 이후 250명, 그리고 나중에 30명이 순차적으로 도착하였다. 4차 이민 285명[50가구]은 1964년 8월 18일 리우데자네이루항(Rio de Janeiro港)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5차 이민 483명 [69가구]은 가톨릭 이민으로, 1966년 파라나주(Paraná州) 파라나구아항(paranaguá港)에 도착하였다.
참고로 가톨릭 이민단은 세 차례에 걸쳐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첫 번째 그룹[53가구 313명]은 1966년 1월 13일에[이들이 도착하기 이전, 주택 건설을 위해 건축가 등을 포함한 47명이 먼저 도착했는데, 이들을 포함하면 총 360명], 두 번째 그룹[13세대 140명]은 1966년 6월 15일에, 그리고 세 번째 그룹[3세대 30명]은 1966년 8월 16일에 도착하였다.
초기 영농이민단은 한국에서 쟁기를 비롯한 여러 농기구와 고추장, 된장이 든 커다란 항아리와 절구 등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들은 브라질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브라질 농업은 기계를 사용하는 대규모의 농장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기 브라질 영농이민단의 실패에는 다음의 두 가지 원인이 작용하였다.
첫 번째 원인[내적]으로는 그들의 한국에서의 신분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 이민으로 송출된 사람들이었지만, 원래 농업 종사자가 아니라 최소한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과 기독교인으로, 해외 사정에 비교적 밝은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많은 사람이 북한 출신으로, 한반도에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으로, 특히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브라질을 선택했다고 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로 당시 브라질 영농이민이 ‘도피 이민’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참고로 1969년 브라질 한인회가 상파울루 거주 510가구의 출신 지역을 조사했는데, 서울과 경기도가 각각 53.5%, 4.7%였고, 출신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의 비율이 19.3%나 되었다.
두 번째 원인[외적]으로는 1960년대 브라질이 한창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인들은 자연스럽게 브라질인들의 도시로의 이주 물결을 타고 인근의 도시로 이주하였다. 그동안 외국 이민자들을 수용했던 브라스 이민수용소는 브라질에서 가장 가난한 북동부에서 먹을 것을 찾아 남동부로 내려온 노동자들을 수용하였다. 한국의 1차 영농이민단도 예정된 농장에 들어가지 못하여 이곳을 거쳐 갔다.
1980년대 제5공화국 시기, 전경환의 브라질 방문 이후 상파울루 인근에서 한인 80명이 농업을 시도한 적이 있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최근에는 커피 농장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몇 세대 되지 않은 그들은, 상파울루 한인들이 필요로 하는 채소를 재배하기도 하고, 고추장이나 된장 등을 담가서 오뚜기 슈퍼를 비롯한 한국 식품점에 제공하고 있다.
한국 영농이민자 대부분이 4년이라는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인근의 도시로 이주하자, 브라질 정부는 더 이상 한국 영농이민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파라과이나 볼리비아를 통해 브라질로 들어가며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이들은 정식으로 이민 비자를 받아서 상파울루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과 갈등했는데, 이는 나중에 ‘신파[불법체류자들]와 구파[군 출신으로 정식 비자를 받아 도착한 사람들]’의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300명의 한국 영농이민단은 1970년대 초반 약 1,400명의 기술 이민자들이 브라질로 들어올 수 있게 초석을 다졌고, 오늘날 한인 사회는 상파울루의 봉헤치루(Bom Retiro)와 브라스에서 여성 의류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