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문화사절단

한자 韓伯文化使節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브라질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2년
원어 주소 Brasil
영문 주소 Brazil
성격 이민 단체
설립자 한백문화협회
정의

1962년 브라질 정부와 한인 이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설립된 한백문화협회가 브라질에 파견한 실무 협의단.

개설

한백문화협회 2대 회장이던 정인규는 브라질 이민을 합법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한백문화협회사단법인 한백진흥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이어 이종욱 초대 회장이 브라질 정부와 이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목적으로 초청 허가를 받은 ‘문화사절단’ 14명의 명단을 재조정하고, 1명을 더 추가하여 브라질 입국 수속을 밟았다. 이렇게 선정된 15명이 정인규[단장], 박대진, 윤황선, 김상진, 정수남, 홍관순, 한춘교, 심준열, 박종식, 이종만, 이철희, 김용, 목진태, 최준덕, 고광순이었다.

브라질 이민은 정부의 주도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한백문화사절단 구성원들이 개인적으로 주도해 탄생시킨 것이다. 정부의 책임 부서인 보건사회부의 이민과조차도 관여할 수가 없었고, 외무부의 교민과조차도 형식적으로 일을 보는 정도였다. 이는 당시 브라질에 한국의 외교 공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이민협회[1961년 1월 설립] 역시 정부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여 유명무실한 존재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브라질에서 어떤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들이 보내는 일방적인 편지에 의지할 뿐이었다.

설립 목적

한백문화사절단은 표면적으로 한국과 브라질 양국 간의 문화 교류 증진을 위한 사절단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15명의 구성원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이민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설립한 이민 교섭 단체였다.

변천

1961년 12월 25일 정인규[예비역 대령]가 이끄는 15명의 이민 교섭단은 야심차게 김포공항을 떠났다. 그들은 브라질 비자조차 받지 않은 채, 무작정 미국 워싱턴의 한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며 브라질 비자를 받아 달라고 떼를 썼다. 그 결과 그들은 한 달 만에 한국 대사관의 도움으로 브라질 비자를 획득, 1962년 1월 14일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브라질에 도착한 한백문화사절단 15명은, 도착하자마자 사분오열하였다. 그렇지만 당장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선 일본인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을 앞세워 브라질 정부에 줄을 대기 시작하였다. 증거는 없지만, 이처럼 그들이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이민 사업에 손을 댈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에서 미리 다른 이민 희망자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걷어 갔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어쨌든 한백문화사절단이 브라질에서 분열했다는 뉴스가 한국에 전해졌을 때, 일반인들은 충격을 받았고 최고의회 안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한백문화사절단 구성원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육사 출신 이종욱, 이정수, 김영묵 등의 군인 그룹, 두 번째는 이북 출신의 기독교인 그룹, 세 번째는 자신의 가족을 브라질로 데려가기 위해 브라질 사정을 미리 파악하고자 하는 이철희, 고광순, 윤유선, 목진태 등이었다. 이 중 세 번째 그룹의 직업은 주로 동대문 상인, 외교관, 이발사, 위스키 제조업자 등의 소상공인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 등으로 매우 다양하였다.

한백문화사절단 15명 중 고광순은 자신의 브라질 이민 결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우리 모두 자기 도피하느라고 브라질에 온 겁니다. 나 자신도 왜 오게 되었는고 하니, 하여간 더 넓은 데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한국이 좋다거나 싫다는 것이 아니라 하여간 좀 더 자유로운 나라,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었던 겁니다. 나는 내가 한국에서 좋은 환경에 있었다면 굉장히 큰 인물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일본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통에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중략) 나는 동경의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전쟁이 터져서)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시험 쳐 들어갔는데 끝까지 공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또 6.25가 터졌습니다. 내가 또 뭘 잘못했냔 말이지요. 나는 그때 한국에 사는 내 자신이 무척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좀 더 넓은 데로 가서 내가 열심히 살기만 하면 내 맘대로 성장 발전할 수 있는 그런 곳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브라질이었습니다.”

고광순은 여권과 브라질행 비행기표를 얻을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한백문화사절단 중 브라질에 내가 제일 늦게 도착했습니다. 딴 사람보다 3개월 후에 도착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갑자기 문화사절단에 들어가서 (중략) 한국을 떠나기 전에 정리할 것들이 조금 있었습니다. 여권을 다른 사람과 같이 받았지만 나는 그때 그들과 함께 떠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 도착한 때는 4월 초였습니다 (중략) 정인규 씨가 처음에 내게 건 조건은 비행기표 세 장을 해 달라는 거였어요. 그걸 주었기 때문에 나는 여권과 내 비행기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개인 간의 거래로 이제는 말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딴 사람들은 자기네끼리 이래저래 아는 사람들이지만, 나는 전혀 성격이 다른 사람이었거든요. 제주도에서 통조림 공장이나 하던 나를 정인규 씨가 브라질에 데려온 거니까, 나는 그 자체가 고마웠습니다. 정인규 씨가 그렇게 해 준 거니까요. 당시 민간인으로서 이민을 간다고 해서 여권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정인규 씨는 브라질로 떠나기 전 서울에서 2~3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브라질에 와서도 그분을 자주 만나기는 힘들었어요. 그분은 군인 출신이라 군인 계통으로 온 사람들과 어울리고, 우리 민간인들은 민간인 계통의 사람들하고만 어울렸기 때문이지요. 왜 그런지 뭣이 달라도 달랐어요. 그들은 그들대로 움직였고, 나는 민간인으로 온 한춘교나 이철희 같은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어요.

의의와 평가

한백문화사절단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설립된 첫 번째 이민 사업 단체로, 실제로 1960년대 네 차례의 집단 영농 이민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들이 개인적으로 추진하여 성사시킨 이 브라질 집단 영농 이민 사업은, 볼리비아 이민을 포함하여 브라질 불법체류자 문제 등 온갖 말썽의 실마리를 제공한 원천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현규환, 『한국유이민사』하-브라질 편(삼화인쇄(주)출판사, 1976)
  • 「브라질이민의 현황과 문제」(『교포정책자료』8, 해외교포문제연구소, 1969)
  • 최금자, 「브라질 이민사: 브라질 한인교포사회의 조명」(『외교』54, 외교통상부, 2000)
  • 최금좌, 「삼바 춤을 출 수 없었던 재 브라질 한인교포사회: 그 발자취와 세계화 시대의 전망」(『국제지역연구』4-2,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2000)
  • Choi Keum Joa, 「Além do Arco-Íris: A Imigração Coreana no Brasil」(Universidade de So Paulo, 1991. 5.)
  • 인터뷰(브라질 한인 고광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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