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朱榮福 |
|---|---|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 지역 |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
| 시대 | 현대/현대 |
| 출생 시기/일시 | 1924년 |
|---|---|
| 활동 시기/일시 | 1956년 2월 6일 |
| 몰년 시기/일시 | 2007년 |
| 출생지 | 중국 간도 용정 |
| 활동지 |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
| 원어 주소 | São Paulo, SP, Brasil |
| 성격 | 학자|작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브라질 한인회 부회장|『포한 사전』 저자 |
중립국을 선택한 반공포로 출신으로 1956년 2월 6일 브라질에 건너가 『포한 사전』 등을 저술한 작가.
주영복의 본적은 함경북도 나남이지만, 출생지는 간도 용정이다. 북간도 두도구(頭道構)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국 용정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웠고, 만주 하얼빈에서 생활하던 중 러시아혁명을 피해 피난 나온 백계 러시아인들에게 러시아어를 배웠다. 1945년 광복 후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소련 공산군에 입대하였다. 이후 주영복은 공병 병과 소좌로 승진하였으나 6·25전쟁 중 공산주의 체제에 회의를 느껴 국군·연합군에 투항하였다. 부산 포로수용소를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주영복은 이곳에서 영어를 독학하였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이나 유엔군의 동의 없이 2만 명의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주영복은 1954년 적십자사의 도움으로 중공군 포로 12명을 포함한 88명과 함께, 북한이나 남한이 아닌 당시 중립국이었던 인도를 선택하여 무국적자로 인천항을 통해 인도로 건너갔다. 그리고 1956년 2월 6일 주영복은 51명의 반공포로 신분으로 브라질에 도착하였다[이들 중 8명은 아르헨티나를 선택하였다]. 사실 이들은 미국이나 캐나다를 희망했으나, 두 나라는 이들을 자신과 싸웠던 적군으로 간주하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영복 등 반공포로들은 자신들을 받아 준 브라질 정부에 감사의 표시로,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내리자마자 브라질 국가를 불러서 브라질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이들은 최국주의 지휘 아래 브라질을 떠나기 전 인도에서부터 꾸준히 브라질 국가를 연습하였다고 한다. 이때 공항에는 브라질 외무성의 요청으로 한인 교포 김수조, 장승호, 이중창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곧바로 그들은 인근의 ‘꽃의 섬’이라는 뜻의 ‘폴로리스 섬[Ilha de Flores]’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 카니발 기간 직전 브라질에 도착한 이들이 브라질에 대해 가진 첫 인상을 적은 내용이 김시봉의 『남미 환상곡』에 나오는데, ‘아름다운 해변의 여인들’과 ‘풍부한 과일’이었다. 그리고 “만일 이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바로 여기 브라질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주영복은 1960년대 초 브라질 쿠바타오 제철소[Cubatão Usina]의 협력사였던 일본 제철[Nippon Steel]에서 일본어 번역 및 통역으로 일하였다. 그러던 중 이민 사업을 위해 정인규 단장이 이끄는 한백문화사절단 15명이 브라질에 도착하자, 다른 반공포로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시 대부분의 반공포로들이 일본계나 브라질 여인들과 결혼했지만, 그는 총각으로 남아 있었다. 이에 1차 집단 영농 이민자들이 ‘사진 신부[picture bride]’로 중매하여, 신부가 1963년 초 비행기로 캄피나스(Campinas)의 비라코푸스(Viracopos) 공항에 도착했는데, 한국에서 아내 될 사람을 초청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주영복이 이미 브라질 시민권을 취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주영복 부부는 상파울루 한인촌인 콩지 지 사르제다스(Conde de Sarzedas) 거리의 작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꾸리고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낳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주영복 가족은 이곳에서 1986년 전반기까지 살았는데, 그들이 한인촌을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으로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1년 미국 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시카고대학교 교수]가 자신의 저서 『The Origin of Korean War』에서, 6·25전쟁의 발발 원인이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 남한이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주영복은 자신이 소련의 군사 고문단에서 한 일이 소련의 남침 계획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86년 주영복이 가족과 함께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로 재이주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그가 브라질 거주 30년 만에, 카니발 축제 기간 직전인 1986년 2월 새벽 6시 산책 중 일본인촌인 리베르다지구(Liberdade區)에서 강도를 만났기 때문인데, 강도는 잔인하게도 그가 입고 있던 바지를 마치 하와이 원주민의 치마처럼 칼로 갈갈이 찢어 놓았다. 상파울루에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당시 브라질의 치안 상태가 매우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브라질은 21년간의 군정을 종식시키고 1986년 민정이 들어섰으나, 군정 말기부터 시작된 연 1,000%가 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경제가 매우 어려워지면서 사회가 매우 불안정해졌다. 미국으로의 이주는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던 처형의 초청으로 가능하였다. 실제로 주영복은 미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나이 든 늙은 노인으로, 당시 그가 얻은 일자리는 어느 건물의 야간 수위였다.
주영복은 한국에서 보낸 문화사절단이 브라질에 도착하자 1962년 『동아일보』 에 「망향」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문화사절단 고광순의 요청과 또한 한인회 회장단의 꾸준한 요청으로 주영복은 곧바로 포르투갈-한국어 사전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은 자신을 포함한 반공포로들이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한 고통이 컸기 때문이었다. 주영복은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고 밤에는 사전 작업을 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불문과 출신인 연봉원 변호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맞춤법 등의 작업을 도왔다. 작업 시작 10년 만인 1972년 원고를 탈고하였지만, 출간하기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것은 한국의 출판사들이 포르투갈-한국어 사전에 대한 수요가 없다고 판단하거나, 혹은 그의 작업이 아주 오래된 일본 사전을 번역한 것이라고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주영복이 사전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민중서림이 1956년 발간한 『영한사전』이었다. 이 외에도 포르투갈어-영어 사전, 포르투갈어-일본어 사전, 그리고 영어-한국어 사전을 참고하였다.
한국일보사 브라질 지사장이었던 홍갑표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우선 한국의 해외교포문제연구소 문인구(文仁龜) 소장[자유당 시절 검찰총장, 당시 변호사로 활동 중]과 이구홍 사무청장과 출판 문제를 상의하엿다. 그 결과 1975년 성안당에서 『포한사전』이 나오게 되었다. 『포한사전』은 총 1,128쪽으로, 발행인은 홍갑균과 주영식, 발행처는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출판사는 성안당, 그리고 정가는 6,000원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영복은 저작권을 포기하고, 모든 권리를 출판사 성안당에게 넘겼다. 즉 경제적 이익은 전혀 보지 못하였지만, 사전이 출판된 것만으로 만족하였다고 한다.
198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주영복은 건물의 야간 경비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지나온 삶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원고를 KBS에 보냈고, 1989년 KBS의 6.25 특집 다큐로 방송되었다. 이 원고는 『내가 겪은 조선전쟁』이라는 이름으로 1990~1991년 고려원에서 총 3권으로 출판되었으며, 『76인의 포로들』이 1993년 대광출판사에서 나왔다.
주영복의 『포한사전』은 한인들이 브라질 사회에 적응하는데, 그리고 한국에서 포르투갈어를 전공하는 학생들과 주재원들의 브라질 진출에 절대적으로 기여해 왔다. 『포한사전』은 브라질 한인 사회 60년의 역사 중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