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張昇浩 |
|---|---|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 유형 | 인물/예술인 |
| 지역 | 브라질 상파울루주 |
| 시대 | 현대/현대 |
| 출생 시기/일시 | 1907년 3월 23일 |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몰년 시기/일시 | 2000년 5월 1일 |
| 출생지 | 충청북도 영동군 |
| 거주|이주지 | 브라질 상파울루주 |
| 활동지 |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
| 원어 주소 | SP, Brasil |
| 성격 | 사업가 |
| 성별 | 남 |
1928년 일본 국적으로 브라질 상파울루 지역으로 건너가 쌀장사 등을 하며 한인 이주자들을 도와준 사업가.
장승호(張昇浩)[1907~2000]는 일본 국적으로 브라질에 입국하여 정착한 10명의 한인 중 한 명이다. 주로 일본계 이민자 커뮤니티 내에서 활동하였지만, 광복 후 브라질로 이민 온 한인들이 현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한인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던 김수조와는 구분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반공포로 출신 사위인 김창언의 증언에 따르면, 장승호는 한인 사회에서 베풀기를 좋아했고, 한인들의 이주 이전 반공포로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하였다고 한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인내심이 강했으며, 힘이 좋았다고 한다.
장승호는 1907년(순종 1) 3월 23일 충청북도 영동군 지역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 살 때 구세군의 메시지를 듣고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열두살 때 교회에 다니는 것을 비난하는 가족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8년 일본인 이민자의 선교를 위하여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는 일본인 선교사를 따라 브라질로 갔다. 1938년 결혼하고, 일본인 아내의 성을 따라 ‘미타(Mita)’ 성을 사용하였다. 슬하에 아들 두 명, 딸 일곱 명을 낳았다. 평생 쌀장사를 하였기 때문에 ‘쌀 할아버지’, ‘미타 할아버지’로도 불렸다. 세뇨르 미타(Senhor Mita)라고도 하였다.
1956년 2월 6일에 6·25전쟁 반공포로 51명이 2년 동안 중립국 인도에서 생활하다가 브라질로 이주하였다. 당시 브라질 외무성은 지역의 한인들에게 반공포로들을 맞이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장승호는 김수조·이중창 등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공항으로 가서 반공포로를 맞이한 것은 물론,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성심껏 음식을 제공하였다. 특히 반공포로인 김창언을 셋째 사위로 삼았으며, 1957년 9월 15일 김수조가 일본인 국적으로 브라질에 온 한국인들과 반공포로들을 모아 한백인회를 조직하는 데도 참여하였다. 1961년 한국에서 한백문화사절단 15명이 브라질에 왔을 때나 1960~1970년대 한국인들이 농업과 기술 이민을 왔을 때도 브라질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무상으로 쌀을 주기도 하였다. 장승호는 주로 상파울루시 봉헤치루에서 활동하였는데, 한인들의 집 보증을 자주 서서 경제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2000년 5월 1일 9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망하기 전 7년간 중풍을 앓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