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鳳熙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 쿠바 마탄사스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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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
| 추모 시기/일시 | 2021년 |
| 출생지 | 인천광역시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거주|이주지 |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시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 |
| 활동지 | 쿠바 마탄사스주 |
| 원어 주소 | Yucatán, México|Frontera, Centla Municipality, Tabasco, México|Provincia de Matanzas, Cuba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집행위원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에서 활동하다 쿠바로 재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봉희(金鳳熙)는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지방회] 총무와 법무원,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부터 의무금, 인구세, 광주학생운동 후원금, 3.1적립금 등 독립운동 자금을 납부하였다. 미구엘 김(Miguel Kim)으로도 불렀다.
김봉희는 1892년(고종 29)께 경기도 강화군 영종면[현 인천광역시 지역]에서 태어났다.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주로 노동 이민을 갔다.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에서 계약 노동이 끝난 이후인 1911년 멕시코의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로 이주하였다. 1921년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 총무 겸 서기를 맡았으나 그해 3월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로 재이주하였다.
1923년 11월 김봉희는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총무로 선출되어 1924년까지 활동하였다. 1925년에는 3.1독립 선언 6주년 기념 만찬회를 김봉희의 집에서 하였는데, 「무궁화가」를 부르고 만세 삼창을 하였다. 이후 김봉희는 마탄사스주 카르데나스로 거처를 옮겼고, 1927년 1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의 평의원, 1928년 7월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12월 7일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신규 임원 체임식 때 ‘본회 장래 방침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1932년 3.1절 기념식에서는 ‘우리가 힘써야 될 것’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1930년부터 1931년까지 김봉희는 카르데나스에서 천도교 쿠바 종리원의 신도집으로 활동을 하였다. 1932년 3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의 학무원을 맡았고, 그해 12월 총무로 선임되었다. 1934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의 총무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1935년에는 법무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6년 1월 사임하였다. 1938년 5월 1일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주관의 순국선현 추도식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진술하였고, 1941년 3.1절 기념식에서는 ‘독립운동 약사’를 설명하였다. 1940년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43~1944년에는 대표원으로 활동하였다.
김봉희는 1919년 독립 의연금으로 2원, 특별의원 5원, 1919년부터 1938년까지 3원 이상의 인구세를 냈고, 1930년 광주학생운동 후원금으로 1원을 내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 자금을 납부하였다.
202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김봉희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