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德淳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코아트사코알코스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 쿠바 마탄사스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3월 27일 |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 추모 시기/일시 | 2020년 |
| 출생지 | 대구광역시 군위군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
| 활동지 |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코아트사코알코스 |
| 활동지 |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 |
| 활동지 | 쿠바 마탄사스주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 México|Coatzacoalcos, Veracruz, México|Frontera, Centla Municipality, Tabasco, México|Provincia de Matanzas, Cuba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부회장|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부회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 활동하다 쿠바로 재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덕순(金德淳)[1880~1944]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지방회] 법무원과 부회장, 민성국어학교 교장,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부회장과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순종 4)부터 1942년까지 보조금, 의무금, 인구세, 광주학생운동 의연금, 국민 부담금, 기본금 등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김덕순은 1880년(고종 17) 3월 27일 경상북도 의성군 소야면[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지역]에서 태어났다.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주로 이민을 가서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1909년(순종 3) 6월 13일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3월 유카탄주 메리다에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숭무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김덕순은 병반(丙班)에 들어갔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의 사낙탄(Sanaktan)경찰소 서기로 임명되어 활동하다 1918년 11월 사임하였다. 김덕순은 베라크루스주 푸에르토 멕시코와 타바스코주 프론테라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1921년 3월 쿠바 마탄사스주로 이주하였다.
김덕순은 1921년 10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에 세워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법무원에 선임되었고, 1922년에는 대의원이 되었다. 1922년 2월 국민회 창립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였으며, 3.1절 경축식에서는 축사를 하였다. 1922년 11월 마탄사스 민성국어학교 교장을 맡았고,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3.1경축식 행렬 때 강연을 하였다. 1923년 8월 국민회 의무금 수봉위원을 맡았고, 9월에는 민성국어학교 찬성원이 되었다. 1924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서문경 회장을 대리하여 회장직을 대리하였다.
1925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학무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6월 14일 지방회 창립 기념식에서 본회의 역사를 진술하였다. 1926년 2월 민성국어학교 교장을 맡았고, 그해 5월 마탄사스 실업회사 감찰원이 되었다. 1927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법무원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민성국어학교 교장이 되었다. 1928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법무원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2월 민성국어학교 교장을 사임하였다. 1928년 4월 아바나에서 김승재와 함께 중국 국민당 간부들에게 구미위원부 유지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1928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평의원에 보임되었고, 신구 임원 교체식에서 ‘사회발전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마탄사스주 카르데나스로 거처를 옮긴 김덕순은 1930년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서기로 선임되었고, 그해 3월 23일 카르데나스 김세원의 집에서 천도교 쿠바 종리원을 설립하였을 때 김덕순은 성도집에 임명되었다. 1931년 2월 국민회 창립식에서 ‘국민회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하였다. 1932년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의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33년에는 법무원, 1934년과 1936년에는 학무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감찰원으로 활동하였고,1938년 3.1절 경축식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진술하였으며, 8월 29일 국치 기념식에서는 ‘와신상담’을 주제로 연설하였다. 1939년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의 서기로 선출되었고, 1941년 대표위원, 1942년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그해 6월 10일 사임하였다. 김덕순은 1943년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총무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44년 3월 9일 64세로 사망하였다.
김덕순은 1910년부터 1942년까지 보조금, 의무금, 인구세, 광주학생운동 의연금, 국민 부담금, 기본금 등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김덕순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