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益權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멕시코 타바스코주 쿠바 마탄사스주 카르데나스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10월 19일[음력] |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 추모 시기/일시 | 2018년 |
|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
| 활동지 | 멕시코 타바스코주 |
| 활동지 | 쿠바 마탄사스주 카르데나스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 México|Tabasco, México|Cardenas, Provincia de Matanzas, Cuba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집행위원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 활동하다 쿠바로 재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한익권(韓益權)[1880~?]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구제원,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총무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부인은 이맏갈닛다이고, 아들은 한우영(韓宇榮), 한원봉(韓遠逢)이다.
한익권은 1880년(고종 17) 10월 19일[음력] 서울 묘동 68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서 태어났다.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주로 이민을 가서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1918년 한범수(韓範壽)[혹은 한범수(韓範洙), 한범수(韓範守)]에서 한익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 1월 멕시코의 타바스코주(Tabasco州)로 이주하여 한인 마을인 ‘신한동(新韓洞)’을 건설하는 데 앞장섰고, 대한인국민회 신한동지방회에 입회하였다. 유카탄주로 돌아온 한익권은 1918년 5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의 사찰에 보임되었고, 1919년에는 구제원에 선출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해 한익권을 상치위원으로 선정하였다.
한익권은 1921년 3월 쿠바 마탄사스주 카르데나스로 이주하였으며, 1923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2월 대한인국민회 창립 기념식에서 ‘기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1924년 2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의 총무로 선출되었으며, 1926년에는 구제원으로 선정되었다. 1927년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법무원 후보가 되었으며, 다음 해인 1928년 평의원이 되었다. 1930년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재무로서 3.1경축식에서 연설을 하였다.
1930년 3월 23일 카르데나스 김세원의 집에서 천도교 쿠바 종리원을 설립하였는데, 한익권은 초대 종리원 경도집에 선임되었다. 1930년 8월 쿠바 종리원 경도집에서 면임되었고, 1934년 2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의 부회장으로 보임되었다. 1938년 2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감찰원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2월 대한인국민회 창립 기념식에서 ‘나라를 근심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1941년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의 구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2~1943년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4월 4일 재큐한족단을 설립하였을 때 한익권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구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익권은 1918년부터 1942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3.1적립금, 국민 부담금 등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한익권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