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역사/근현대 |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쿠바 마탄사스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912년 8월 25일 |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 추모 시기/일시 | 2015년 |
| 출생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거주|이주지 |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 |
| 활동지 | 쿠바 마탄사스주 |
| 원어 주소 | Yucatán, México|Provincia de Matanzas, Cuba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집행위원장 |
멕시코 유카탄주에서 태어나 1921년 3월 쿠바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승택은 1935년 쿠바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지방회] 총무, 1936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청년부 총장, 1939년부터 1944년까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호아킨 리(Joaquin Lee)로도 불렸다.
아버지는 이원준이고, 어머니는 류씨이다. 부인은 김옥선이다.
이승택은 1912년 8월 25일 멕시코 유카탄주에서 태어났다. 이승택의 아버지 이원준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원이었으며,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오스테바 지방 경찰소 법무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승택은 부모님과 함께 1921년 3월 쿠바 마탄사스주로 이주하였고, 1923년 9월부터 마탄사스주 카르데나스에서 생활하였다. 1924년 1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로 거처를 옮겼으며, 아버지 이원준은 1925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이승택은 카르데나스에서 살면서 1931년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서기로 선출되었고, 3.1절 경축식에서 ‘독립선언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1931년 3월 10일 카르데나스에서 설립된 청년토론회의 청년토론회 법무원에 선임되었다. 1931년 9월 6일 아버지 이원준이 사망하였다. 1932년 5월 7일 마탄사스 청년학원 강연회에서 ‘실력양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고, 5월 21일 청년학원 동화회 의장을 맡아 회의를 진행하였다. 1933년 2월 마탄사스 청년학원 회계로 선정되었고, 1933년도 3.1절 기념식에서 ‘손의암 선생의 최후 결심’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마탄사스 청년학원 1주년 기념식에서 예사를 하였고, 그해 6월 3일 조직된 청년학원 야구대의 대장을 맡았다.
1934년 3월 이승택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 7일 임천택이 쿠바 종리원 원장 도첩을 받았을 때 이승택은 감사원에 임명되었다. 1934년 12월 마탄사스 지역 사령관이 한인촌을 심방할 때 이승택이 접대를 담당하였으며, 대일전선동맹 특연금 1달러를 냈다. 이승택은 1935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총무로 선출되었고, 그해 1월 민성국어학교 교육부 규칙재정위원으로 선정되어 총 8개조의 규칙을 제정하였다. 1935년 4월 5일 김세원의 딸 김옥선과 결혼을 하였다. 1936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서기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0월 25일 마탄사스 육군사령부 사령관이 마탄사스 한인촌을 심방하였을 때, 이승택이 영접을 하고 환영사를 하였다.
1937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서기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청년부 총장에 선정되어 청년부 창립 1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하였다. 1938년 3.1기념식에서 연설을 하였다. 1939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2.1국민회 창립 기념식, 3.1절 기념식 등을 주관하였다. 1940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구제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2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한 후 이승택은 한인의 안녕 보장을 위해 라디오와 신문에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2월 10일 일본 타도회에 참석하여 행진을 하였으며, 재쿠바 한인의 입지를 연설하였다. 또 12월 14일에는 이승택의 연설문 3,000매를 인쇄하여 마탄사스 시내에 배포하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쿠바 정부 교통국 검열부에서 이승택에게 아바나에 와서 한인들의 중요 통신에 관한 사건을 해결하라는 공문을 보내 왔다. 1942년 6월 27일 침략국타도회 주최로 ‘공 히틀러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승택이 참석하여 특별 대접을 받았고 총회장 히라우디와 30분간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승택은 같은 해 11월 7일 아바나 국회의사당에서 개최된 침략국타도회에 초청을 받았다. 대일 선전 1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는 집행위원장 이승택의 주관하에 대대적인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1943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2월 1일 밤 침략국 타도에 앞장서는 『오늘』 신문 사장 엣스갈란태의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1943년 4월 4일 재큐한족단이 정식 조직되면서 이승택은 재큐한족단 위원으로 취임하였고, 5월 20일에는 쿠바 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축하문을 들고 참석하였다. 같은 해 7월 11일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선전부원 겸 독립금 수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4년에는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과 1946년 연속으로 서기에 선출되었다.
이승택은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3.1기념금, 국민 부담금,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이승택은 1936년 9월 11일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청년부 동화회에서 「나팔륜의 소년시대」를 발표하였다.
201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승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