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興瑞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헤수스 카란사 와하케뇨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추모 시기/일시 | 2015년 |
|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거주|이주지 | 쿠바 마탄사스주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헤수스 카란사 와하케뇨 |
| 활동지 |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 |
| 원어 주소 | Yucatán, México|Oaxaqueña, Jesus Carranza, Veracruz, México|Matanzas, Provincia de Matanzas, Cuba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부회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에서 활동하다 쿠바로 재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흥서(金興瑞)는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 구제원,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법무원과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김응서(金應瑞)로도 불렀으며 김흥서(金興西)로도 썼다. 스페인어 이름은 마누엘 김(Manuel Kim)이다.
김흥서는 1869년(고종 6)경 서울 서서(西署) 누각동(樓閣洞)[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지역]에서 태어났다.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주로 노동 이민을 갔다. 노동 계약 기간이 끝난 후 베라크루스주 헤수스 카란사 와하케뇨로 이주한 김흥서는 1913년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 구제원에 임명되었다. 1913년 6월 의무금 2원 50전을 냈고, 1914년 7월 의무금 2원 50전을 냈다. 1914년 8월경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3월 쿠바 마탄사스주로 재이주한 김흥서는 1923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지방회] 법무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3.1기념 경축식에서 헌법을 낭독하였고, 같은 해 5월 박수길의 행패를 심사하여 처벌하였다. 1923년 9월 16일 민성국어학교 개학식에서 찬성원이 되었다. 1925년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25년 6월 인구세 1원을 냈다. 1927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법무원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5월 인구세 1달러를 냈다. 1928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29년 5월 인구세 1달러를 냈다. 1930년 2월 광주학생운동 후원금 1원을 냈고, 장인환 의사 추도금으로 50전을 냈다. 1931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법무원으로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1934년 2월 인구세 1달러를 냈고, 12월에는 대일전선동맹 특연금 1달러를 냈다. 1936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총무로 선임되었고, 1940년에는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의무금, 인구세 등을 지속적으로 납부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김흥서는 1913년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대일전선동맹 특연금, 3.1기념금, 국민 부담금,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201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김흥서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