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車熙觀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12월 21일[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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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 추모 시기/일시 | 2014년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Matanzas, Provincia de Matanzas, Cuba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활동하다 쿠바로 재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차희관(車熙觀)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과 부회장,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토마스 차(Tomas Cha)라고도 불렀다.
부인은 이산호이다.
차희관은 1878년(고종 15) 12월 21일[음력]에 태어났다.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주로 노동 이민을 갔다. 1921년 3월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로 이주하여 그해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서기를 맡았다. 구미위원부 쿠바 지방부가 조직되자 총무에 임명되었고, 1922년 1월 독립운동 자금 25원을 구미위원부에 보냈다. 1922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3월 쿠바 동포의 생활이 곤란해지자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구제금 311원 84전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인 차희관에게 보냈다. 1922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으로서 2.1국민회 창립식과 3.1절 경축식을 주관하였다. 1923년 8월 차희관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평의원으로 보결되었고, 1924년 3.1절 경축식에서 대표 예사를 하였다. 1925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법무원에 선임되었고, 3·1절 경축식에서 임시정부 헌법을 낭독하였다.
1925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는 담례금으로 식량을 구입하여 동포들에게 배급하고자 상례회를 조직하고, 상례회장에 안순필, 총무에 이세창, 서기에 김덕순, 회계에 서문경, 의사원에 차희관, 사찰에 양춘명과 박근배, 가사에 주한옥 등을 선임하였다. 1925년 9월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법무원을 사임하였고, 1926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재무로 선출되었다. 1929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대의원에 선임되었고, 그해 3월 구제원에 보선되었다. 1930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총무로 선출되었는데, 같은 해 2월 5일 경제적으로 곤란했음에도 광주학생운동 후원금 1원을 냈다. 1930년 6월 1일 장인환 의사 추도식을 거행한 후 추도비 50전을 냈다.
1930년 12월 7일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신구 임원 교체식에서 차희관이 헌장과 인장을 신임 회장에게 전달하였다. 1931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32년 3월 7일 청년학원 개학식에서 학문에 힘쓰라고 말하였다. 1936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 조직된 마탄사스 청년부 연무부장 겸 남자반 교사로 선정되었다. 1936년 8월 29일 국치 기념식에서 ‘오늘의 감상과 장래의 방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1937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는 차희관 등 39명이 각 30전씩을 모아 중일항일전쟁 동정금으로 마탄사스 중국국민당 분부를 경유하여 중국 정부에 보냈다. 1939년 차희관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가 개최한 3.1절 경축식에서 연설을 하였고, 1940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교육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2.1국민회 창립식과 3.1절 경축식 등을 주관하였다. 같은 해 8월 14일 아바나에서 개최된 중국항공연합회에 마탄사스 지방 대표로 참가하여 한·중 양 민족의 합작에 노력하였다. 1943년도 3.1절 경축식에서 연설을 하였으며, 1945년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감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교육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차희관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대한인국민회 대표 경비, 3.1기념금,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2014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차희관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