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昌雲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시 쿠바 아바나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1월 21일 |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추모 시기/일시 | 2011년 |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
| 활동지 |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
| 활동지 | 쿠바 마탄사스주 마탄사스 |
| 활동지 | 쿠바 아바나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 México|Veracruz, México|Matanzas, Provincia de Matanzas, Cuba|La Habana, Cuba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활동하다 쿠바로 재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박창운(朴昌雲)[1889~?]은 1916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외교위원, 1924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지방회] 회장, 1928년 마탄사스 민성국어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의무금, 인구세, 3.1금, 독립 의연금, 광복군 후원금 등 각종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큰아들은 박선봉[패물점 경영], 큰딸은 박선녀[재봉사], 둘째 아들은 박선환이다.
박창운은 1889년(고종 26) 1월 2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주로 노동 이민을 갔다. 1911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 가입하였고, 1917년 외교위원이 되었다.
박창운이 교섭하여 유카탄의 한인들 중 일부가 1920년 4월 베라크루스주 지역 산타페(Santa Fe)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박창운과 김세원의 주선으로 1921년 3월 쿠바 라스투나스주 마나티(Manati)로 갔다가 많은 수가 그해 중순 다시 마탄사스주의 마탄사스로 옮겨 갔다. 마탄사스 이주 얼마 후 아바나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한인들도 일본 재외국민으로 등록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박창운 등을 비롯한 한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1921년 6월 14일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는 마탄사스 지방 정부에 정식으로 관허장을 신청하였고, 박창운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외교원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법무원으로 선정되었고, 1924년 5월에는 외교원이 되었다.
1924년 6월 박창운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9월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관 건축위원이 되었다. 1925~1927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외교원으로 동포 사회를 위해 공헌을 하였다. 마탄사스 한인들은 1926년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자 상업회사를 설립하였는데 박창운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8년 마탄사스 민성국어학교 교장을 맡았고, 1929~1931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5월 박창운은 천도교 쿠바 종리원 마탄사스 면종리원 종리사가 되었다. 1932년 8월 쿠바 정부에서 외국인들에 인구세를 납부하도록 하자 박창운이 쿠바의 유력 신문에 한인들의 경제 사정을 알리기도 하였다. 1933년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으며, 1934년 평의원장이 되었다. 1936~1939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교육부원, 1939~1940년 선전위원을 맡았다.
1941년 8월 14일 쿠바의 아바나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의 항절대회 기념식에서 박창운이 한인 대표로 연설을 하였다. 1942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해 11월 7일 아바나에서 ‘침략국 타도회 총회’ 주최로 러시아 국경일 경축대회에 이승택·임천택과 함께 참석하였다. 1945년 7월 29일 열린 재큐한족단 대표 회의에서 박창운은 부단장에 선출되었다. 김구가 쓴 『백범일지』에 “쿠바의 임천택·박창운 등 제씨가 정부 후원에 참가”하였다고 나온다. 의무금, 인구세, 3.1금, 독립 의연금, 광복군 후원금 등 독립운동 자금을 납부하였다.
201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박창운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