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根永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멕시코 멕시코시티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5월 9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
| 몰년 시기/일시 | 1961년 9월 26일 |
| 추모 시기/일시 | 2016년 |
| 출생지 | 서울특별시 중구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
| 활동지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활동지 |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 México|Ciudad de México, México|Veracruz, México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대한인국민회 묵경지방회 회장|숭무학교 교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근영(李根永)[1875~1961]은 1909년(순종 3) 5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1910년(순종 4) 숭무학교 교장, 1914년 대한인국민회 묵경지방회[멕시코시티지방회] 회장, 1940~1944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총무 등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3.1성금, 광복군 후원금, 국민 부담금, 독립금 등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이근영의 본명은 이광필이다. 이근영(李根英)으로도 쓴다.
부인은 김이사벨이고, 아들은 이마누엘, 딸은 이홍순이다.
이근영은 1875년(고종 12)께 서울 남서 쌍림동 수구문내[현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에서 태어났고, 대한제국 진위대 공병대 하사로 활동하였다.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주로 노동 이민을 가서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였다. 이근영은 1908년(순종 2)쯤 속전을 내고 농장에서 해방되었다.
1908년 3월 이근영은 장인환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 재판 비용을 모금하였고, 의연금 2.5원을 냈다. 『공립신보』 1909년 1월 20일 자에 「의연금 모집 취지서」를 게재하였고, 『공립신보』를 위하여 의연금 5원을 낸 데 이어 『공립신보』에 의연금 2원 10전을 냈다. 또한 에네켄 농장에서 풀려난 한인들의 구제와 실업에 힘쓰기 위하여 ‘친목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친목회의 총무는 김윤원, 재정은 김제선, 사찰은 황면주였다.
1909년 5월 9일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11월 18일 국욕(國辱) 기념일에 도지휘관으로 회원들을 조련하여 무예 교련을 보여 주었다. 1910년 2월 1일 청년들 수십 명을 모아 숭무학교를 개교하고 교장이 되어 무예를 훈련시켰으며, 같은 해 『신한민보』 2월 2일 자에 「결심가」를 게재하였다. 또한 4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11년 9월 이근영은 멕시코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추진하기 위하여 총대(總代)로서 김동현, 이명수, 이병은 네 명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러나 이근영 등은 미국 이민 조례에 저촉되어 하와이로 가지 못하고 같은 해 11월 26일 유카탄의 프로그레소항으로 돌아왔다.
이근영은 1911년 12월 11일 유카탄주 메리다의 한인들을 데리고 베라크루스주 헤수스 카란사 와하케뇨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하였고, 12월 17일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를 창설하고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3년 이근영은 와하케뇨에서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였으며, 1914년 대한인국민회 묵경지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5년 6월 멕시코시티에서 다시 와하케뇨로 돌아갔으며, 1916년 베라크루스주 코아트사코알코스로 이주하였다.
이근영은 1916년 유카탄에서 동포 청년 33명을 모집하고 그 외 유카탄 각지에서 모집한 청년을 합쳐 40여 명을 이끌고 과테말라 반군에 참가하였다. 1917년 이후 베라크루스주 푸에르토 멕시코에 정착하여 어업에 종사하였으며, 1924년부터 대한인국민회 푸엘토예비지방회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대한인국민회 푸엘토예비지방회 3.1절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였고, 1928년 2.1국민회 기념식에서 대한인국민회의 역사와 장래의 유지 발전에 대하여 웅변을 하였다. 1930년 대한인국민회 푸엘토예비지방회의 3.1절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였고, 1934년 국치 기념식에서 기념금을 냈다. 1936년 대한인국민회 푸엘토예비지방회 교육부원으로 선출되었고, 1937년에는 2.1국민회 창립식에서 축사를 하였다. 1938년도 대한인국민회 푸엘토예비지방회 감찰원으로 선임되었으며, 2.1국민회 창립식에서 연설을 하였다.
이근영은 1939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푸엘토예비지방회의 이름을 개칭함]의 3.1절 기념식에서 답사를 하였으며, 1940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총무로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총무로 선임이 되었고, 8월 29일 국치 기념식의 주석을 맡았다. 1942년에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총무로 재선출되었고, 같은 해 6월 7일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전체 대회를 열어 한인들의 안녕과 단결을 촉구하였다. 1944년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총무로 선임이 되었고, 같은 해 3월 1일 감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근영은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3.1성금, 광복군 후원금, 국민 부담금, 독립금 등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1961년 9월 26일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2016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근영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