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春三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77년 4월 |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 추모 시기/일시 | 2016년 |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
| 활동지 |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 México|Centla Municipality, Tabasco, México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 부회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박춘삼(朴春三)[1877~?]은 1924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1926년과 1929~1930년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알바로오브레곤지방회, 오부리곤지방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순종 3)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광복군 후원금, 3.1금, 독립금 등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부인은 현왁기나이고, 아들은 박선달(朴先達)이다.
박춘삼은 1877년(고종 14) 4월 20일경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남정면(南亭面) 상동(床洞) 315호에서 태어났다.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을 가서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1909년 5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 입회하였고, 1917년 1월 사낙탄(Sanaktan)경찰소 법무원으로 선정되었다. 1923년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후보로 출마하였고, 1924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유카탄주에서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로 이주한 박춘삼은 1925년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가 주최한 3.1경축식에서 연설을 하였다. 프론테라에서 자농(自農)을 하던 박춘삼은 홍수와 메뚜기 떼가 덮치며 450원의 금전적 손해를 입었다. 1925년 8월 프론테라 국어학교 교장을 맡아 한인 2세들에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6년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1928년에도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회장 이영순이 멕시코시티 푸에르토로 이거하자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1929년과 1930년에도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센틀라시 알바로 오브레곤(Alvaro Obregón)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음 해 유카탄주 메리다로 돌아왔다. 1934년과 1935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총무로 선출되었다. 1935년 1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관의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기의 영업을 불고하고 유진태를 돕기 위해 공익을 위하여 자기 돈을 써 가면서 각 농촌에 거류하는 동포를 심방하고 의연금을 수합하였다.”고 『신한민보』에 나온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의 재정이 부족하자 50원을 기부하였다.
1936년 박춘삼은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비로 5원을 냈다. 1937년 국치 기념식에서 기도와 감상담을 하였고, 1938년 임시정부 후원금으로 29원 80전을 냈다. 1941년 2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관을 수리할 때 많은 재정을 기부하였고 동포 사회를 위해서도 헌신하였기에 ‘평화 사도’라고 불렀다. 박춘삼은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임시정부 후원금, 광복군 후원금, 3.1금, 독립금 등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2016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박춘삼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