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學瑞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2월 4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추모 시기/일시 | 2021년 |
| 출생지 | 황해도 배천군 남면 길로지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
| 활동지 |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 México|Frontera, Centla Municipality, Tabasco, México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학서(李學瑞)는 1911년 대한인국민회 신한동지방회[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를 창립하는 데 힘을 모았으며, 1918년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부회장, 1927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1943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집행위원장 등을 맡았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의 3.1 경축식, 국치 기념식, 광복군 축하식 등 각종 행사를 주관하였고, 인구세,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군자금 등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이학서(李學西)로도 쓴다.
라켈 김 윤(Raquel Kim Yun)과 결혼하여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학서는 1882년(고종 19)쯤 황해도 배천군 남면 길로지에서 태어났다.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주로 노동 이민을 갔다. 에네켄 농장에서 해방된 이후 타바스코주로 이주하여 1911년 2월 4일 대한인국민회 신한동지방회를 창립하였다. 1918년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8월 29일 국치 기념식에서 ‘국치 제8년’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이후 유카탄주 메리다로 돌아온 이학서는 1926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다 1927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총무로 활동하였으며,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국치 기념식에서 기도를 하였다. 이학서는 1935년 국치 기념식에서 태극기와 국민회기를 교차하여 세우고 애국가를 합창하자고 제안하였다. 1942년 8월 29일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국치 기념식에서는 현기식을 거행하고 만세 삼창을 주도하였고, 11월 17일 순국 선열 기념식에서는 기조 연설을 하였다. 1943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각종 행사를 주관하였다.
이학서는 1909년(순종 3)부터 1945년까지 의무금을 지속적으로 납부하였고, 애국동맹단 의연금, 임시정부 후원금,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군자금 등 각종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202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학서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