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益周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멕시코 멕시코시티 멕시코 타마울리파스주 탐피코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헤수스 카란사 와하케뇨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2월 22일 |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8월 11일 |
| 추모 시기/일시 | 1999년 |
| 출생지 | 황해남도 재령군 남률면 봉고동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
| 활동지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활동지 |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헤수스 카란사 와하케뇨 |
| 활동지 | 멕시코 타마울리파스주 탐피코 |
| 묘소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 México|Ciudad de México, México|Tampico, Tamaulipas, México|Oaxaqueña, Jesus Carranza, Veracruz, México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탐피코지방회 회장 |
1905년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탐피코지방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익주의 큰아들은 김동철[호세 김 펙(Jose Kim Peck)], 딸은 마리아 김 펙(Maria Kim Peck)[김수권의 부인], 둘째 아들은 김동필[프란시스코 김 펙(Francisco Kim Peck)]이다. 김동필의 큰아들은 데이빗 김[김성완]이고 둘째 아들은 아벨 김 콩(Abel Kim Kong)[김재완]이며, 딸 마리아의 자녀로는 첫째 아들 아돌포 김(Adolfo Kim)[김창수], 둘째 아들 로돌포 김(Rodolfo Kim)[김수명], 딸 엘레나 김(Elena Kim)[김윤인]이 있다.
김익주는 1873년(고종 10) 황해남도 재령군 남률면 봉고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고종 42)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을 와서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였다. 1910년(순종 4) 차툰(Chactun) 농장에서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의 경찰소 서기로 임명되었고, 1911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법무원이 되었다. 이후 멕시코 베라크루스주로 건너갔고, 1912년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 대의원이 되었다. 다시 타마울리파스주 탐피코(Tampico)로 이주하여 과자점 등을 경영하였으며, 1917년 대한인국민회 탐피코지방회의 파출위원으로 파견되었다.
1919년 3월 9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탐피코의 김익주에게 3·1운동 소식을 전보로 알렸고, 이후 김익주는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 연락을 취하며 탐피코의 한인들과 매일 모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한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김익주는 대한인국민회 탐피코지방회의 이름으로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였다. 또한 상하이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적십자사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이후 김익주는 대한인국민회 탐피코지방회 회장을 맡아 3·1운동 기념행사, 순국 선열 기념식 등과 같은 행사를 주도하는 등 멕시코 한인 사회의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김익주는 이후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1928년 2월 22일 한인 청년들을 모아 묵경한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묵경한인청년회는 대중운동 후원, 본국 정신 교양, 지식 계발, 실업 증진, 우리말과 글 보급, 토론회와 강연회, 청년 영예 증진 등 계몽적인 활동을 하였다. 1930년 2월 김익주가 주동이 되어 대한인국민회 묵경지방회에 대항하는 한인자성단을 조직하였다. 김익주는 1955년 8월 11일 사망하였다.
김익주 묘소는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돌로레스 공동묘지[Panteón Civil de Dolores]에 있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김익주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