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基昶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멕시코 타바스코주 멕시코 킨타나로오주 체투말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8월 31일 |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6월 |
| 추모 시기/일시 | 2011년 |
| 출생지 | 경기도 개성군 영북면 길영리 대천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
| 활동지 | 멕시코 킨타나로오주 체투말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 México|Tabasco, México|Chetumal, Quintana Roo, México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기창(金基昶)[1879~?]은 멕시코 유카탄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이자 유카탄주 메리다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면서 모든 재력을 동포 사회와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한 독립운동가였다. 스페인어 이름은 마누엘 김(Manuel Kim)이었다.
아버지는 김평렬(金坪烈)이고, 어머니는 허씨(許氏)이다. 부인은 박바올라, 딸은 마리아이다.
김기창은 1879년(고종 16) 8월 31일 경기도 개성군 영북면 길영리 대천에서 태어났다. 1887년(고종 24)부터 1893년까지 한문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1887년부터 1905년(고종 42)까지 경기도 개성군 남문 송도면에서 활동하였으며, 1898년(고종 35)부터 1899년까지 건재 장사를 하였고, 1901년부터 1904년(고종 41) 무역업을 하였다.
1905년 5월 멕시코 유카탄주으로 이민을 가서 1911년까지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하였다. 1911년 1월 타바스코주(Tabasco州)로 이주하여 ‘신한동(新韓洞)’을 건설하고 신한동 서기로 활동하였다. 이후 유카탄 메리다로 돌아와 1912년부터 잡화 및 재봉점을 경영하였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서기와 재무·구제원 등을 맡았다.
1915년 1월 5,000페소의 자본으로 메리다 시내에 ‘라 누에바 코레아(La Nueva Corea)’라는 상호의 ‘옷감과 잡화점[Almacén de Lienzos y Miscelánea]’을 운영하였다. ‘라 누에바 코레아’는 ‘신대한’ 혹은 ‘신한’이라는 뜻이다. 또한 한인 여관과 식당을 겸업하였다. 같은 해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17년 1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 설립한 해동학교(海東學校) 교장을 맡았다.
1919년 5월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 한인 사회를 위해 공헌한 공적으로 김기창에게 ‘선생’의 칭호를 주었다. 1921년 2월 멕시코 한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의 전권을 위임받아 북미 대한인국민회와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김기창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많은 자금을 제공하였는데,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멕시코의 김기창·이종오, 쿠바의 임천택·박창운 등 제씨가 정부 후원에 참가”하였다고 기록하였다. 1940년 6월쯤 멕시코 킨타나로오주 체투말(Chetumal)로 이거하였으며, 태평양전쟁기 멕시코 한인의 안전과 민족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01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김기창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