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나 협동개발 농장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지명/시설
지역 브라질 파라나주 폰타그로사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개관|개장 시기/일시 1963년
최초 설립지 브라질 파라나주 폰타그로사
원어 주소 Ponta Grossa, Estado do Paraná, Brasil
성격 한인 농장
정의

1963년 2월 12일 브라질에 도착한 제1차 집단 영농 이민자들 중 일부가 파라나주 폰타그로사에 세운 한인 농장.

개설

1962년 5월 브라질 정부가 한국인의 영농 이민을 허가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그해 3월 9일 제정, 공포한 법률 제1030호 「해외이주법」을 근거로 제1차 집단 영농 이민 희망자들을 심사하여, 그중 103명에게 해외 이주 허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제1차 집단 영농 이민자들은 성격상 두 그룹으로 구분되었다, 한 그룹은 가족과 함께 브라질에 도착한 17가구 92명[가구주: 고계순, 안계승, 한승일, 윤명섭, 김종혁, 안동협, 김철현, 서재옥, 김덕조, 장만식, 장상기, 유재선, 양승갑, 한용전, 조중한, 김승한, 정명자]이었고, 또 다른 그룹은 이민 수속 중인 가족을 한국에 두고 가장만 1차 이민에 합류한 11명[박선관, 한승엽, 김해곤, 김명익, 권태영, 윤봉선, 이정수, 김종수, 주성철, 김종한, 김상현]이었다. 이 두 그룹은 55일 동안의 선상 생활에서 화합하지 못하여, 브라질 도착 후 여러 농장으로 분산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건립 경위

제1차 농업 이민자들 중 이민 수속 중인 가족을 한국에 두고 이민에 합류한 11명 중 박선관, 김해곤, 김명익은 10개월 동안 여러 지역을 탐사하다 파라나주(Paraná州) 폰타그로사(Ponta Grosso)의 일본인이 운영하는 농장의 농지를 각각 20알켈씩 매입하여 토마토 재배와 양계업을 시작하였다. 그후 김명익은 30알켈의 땅을 더 샀다. 박선관의 경우, 가족이 1963년 11월 10일 루이스호를 타고 산투스항에 도착하여 그해 12월 말부터 방학으로 비어 있는 인근 학교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파라나주 폰타그로사 지역은 전력도 공급이 안 되었고 인근에 보건소도 없었으며 교육기관은 초등학교뿐이었다. 또 정기적인 교통수단이 없었음에도 박선관 등이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무공해 지대로, 사료용 옥수수를 경작하거나 주변의 농가에서 조달하는 것이 가능했고, 달걀은 농협에서 주 2회 트럭으로 상파울루 시장에 팔아 준다고 했고, 농협에서 융자를 얻어 병아리와 혼합 사료 구입이 가능하다는 등의 장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변천

박선관 등 한인들이 농장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와 싸우며 벌목 작업을 해야 했고, 살 집도 지어야 했다. 그리고 식수를 해결하고자 우물을 파고 양계장을 지었다. 그런데 이러한 농촌 생활의 어려움보다 부모로서 힘든 것은 자녀들이 원주민들처럼 거의 헐벗은 상태로 맨발로 먼 거리에 있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얼마 뒤 김해곤이 가족을 데리고 농장을 떠나 상파울루로 이주하였는데, 아내가 아파서였다. 이후 박경곤 부부가 3남 3녀를 데리고 김명익의 토지 중 15알켈을 사서 입주하였다. 1967년 4월에는 가톨릭 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한 김창식 가족이 김명익의 토지를 사서 입주하고, 1968년 1월에는 박선관의 옛 동료였던 신영균[해군 예비역 대령] 가족이 합류하여 같이 농사를 지었다. 박선관은 1969년 1월 16일 농장을 일본인에게 팔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상파울루시로 이주하였다. 이후 다른 가구들도 상파울루시로 이주하였다.

참고문헌
  • 『브라질 이민 제30주년 기념』(브라질 한인회, 1993)
  • 박선관, 『상전벽해』-브라질 이민수기(교음사, 2010)
  • 「남미 이민의 현실적 과제」(『교포정책자료』18, 해외교포문제연구소, 1978)
  • Choi Keum Joa, 「Além do Arco-Íris: A Imigração Coreana no Brasil」(Universidade de So Paulo, 1991. 5.)
  • 재외동포신문(http://www.dongponews.net)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