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역사/근현대 |
|---|---|
| 유형 | 지명/시설 |
| 지역 | 브라질 파라나주 폰타그로사 산타마리아 |
| 시대 | 현대/현대 |
| 개관|개장 시기/일시 | 1966년 3월 |
|---|---|
| 최초 설립지 | 브라질 파라나주 폰타그로사 산타마리아 |
| 원어 항목명 | Fazenda Santa Maria |
| 원어 주소 | Santa Maria, Ponta Grossa, Estado do Paraná, Brasil |
| 성격 | 한인 농장 |
| 면적 | 14.876㎢ |
1966년 브라질로 건너간 제5차 한인 집단 영농 이민자들이 파라나주 폰타그로사 산타마리아에 세운 한인 농장.
제5차 집단 영농 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한 한인의 수는 총 69가구 514명으로 모두 가톨릭신자들이었다. 이들은 상파울루주 서남부 450㎞ 지점에 있는 브라질의 남부 곡창 지대 파라나주(Paraná州) 폰타그로사(Ponta Grossa)시에서 30㎞ 떨어진 산타마리아에서 농장을 개간하였다. 해발 500~1,000m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농장의 토지 조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어떤 이는 강우만으로 농사를 짓기에 충분할 정도로 조건이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고 평가했던 반면, 또 다른 이는 비만 오면 발이 푹푹 빠져서 농사와는 거리가 먼, 황무지의 늪과 같은 곳이었다고 평가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윤을수 신부를 비롯한 한국 가톨릭 교단은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의 농업 이민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것의 결과가 1966년 69가구의 영농 이민이었다. 가톨릭 이민 희망자들은, 농업 이민 비자를 받고 당시 브라질에서 그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던 윤을수 신부에게 돈을 보내 농장 부지를 매입하였다. 그것은 계약 기간인 3년 동안 브라질에서 농사를 짓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윤을수 신부가 구입한 농장의 규모는 620알켈[1알켈은 2.4㏊ 또는 2만 3801.65㎡에 해당]로, 14.876㎢ 정도였다.
1972년 가톨릭 한인 이민자들은 ‘브라질 토지개척청’ 혹은 ‘브라질 국립 식민 및 토지개혁연구소’라 불리는 INCRA에 산타마리아 농장을 ‘Empresa Colonizadora Santa Maria em Ponta Grossa Parana[파라나주 폰타그로사의 산타마리아 식민회사]’로 등록하였다. 만일 산타마리아 농장을 INCRA에 등록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신분은 오늘날에도 ‘고용 이민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인 이민자들은 INCRA에 농장을 등록했기 때문에 가구별로 토지를 분할 등기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가족이나 친지를 초청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가톨릭 집단 영농 이민자들은 1966년 1월부터 세 그룹으로 나뉘어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첫 번째 그룹은 53가구 313명으로, 1966년 1월 13일 브라질의 파라나주 파라나구아(Paranaguá)항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 주택 건설을 위해 건축가 등을 포함한 47명이 먼저 도착했는데, 이들까지 포함하면 총 360명이 된다. 두 번째 그룹은 13가구 140명으로 1966년 6월 15일에, 세 번째 그룹은 3가구 30명으로 1966년 8월 16일에 파라나구아항에 도착하였다.
파라나구아항에 첫 번째 그룹이 도착했을 때, 지역의 언론들이 한국 가톨릭 농업 이민자들을 취재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농장 구매 대금과 뱃삯을 이미 지불하고 파라나구아항에 도착한 가톨릭 농업 이민자들은 당장 항구에서 300여㎞ 떨어진 산타마리아 농장까지 갈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폰타그로사 교구의 돔 제랄도(Dom Geraldo) 주교가 나섰다. 돔 제랄도 주교는 우선 부녀자와 아이들은 버스로 이동하게 하고, 남자들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인 이민자들이 우선 군인 막사에서 머물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두었다.
그 결과 한인 이민자들은 농장에서 70㎞ 떨어진 카스트로(Castro) 병영 막사에서, 산타마리아 농장 안에 자신들의 주택이 완성될 때까지 한 달 반 동안 머물렀다. 사실 한국 가톨릭 교단은 산타마리아 농장에 한인 이민자들의 주택 건설을 위하여 신부 한 명과 성낙천[성순모, 성경모, 성정모, 성형모 4남매의 아버지]을 비롯한 몇몇 건축가를 미리 선발대로 보내어 한인들의 주택을 건설하고 있었다. 주택이 완성됨에 따라서, 그해 3월 초 모든 가구가 농장에 입주하였다. 그리고 후속 부대로 브라질에 도착한 한인들도 속속 농장으로 집결하였다.
가톨릭 이민자들은 가장 먼저 농지를 측량하였다. 도로 및 그 밖의 공공 면적을 빼고 나니 14.049㎢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그중 농지로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은 절반에 해당하는 6.942㎢ 정도였는데, 가톨릭 이민자들은 가구당 30알켈[약 70만㎡]씩 나누어 농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다.
산타마리아 농장에 정착한 한인 중에는 농사를 지어 본 사람도 있었고, 당장 먹고살 양식이 없어서 곤란을 겪는 사람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는 씨를 뿌려 수확을 거두기까지 1년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전자의 경우 가장 다급한 것은 자녀들의 교육 문제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많은 사람이 곧바로 인근 도시나 상파울루시로 이주하였다.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은 밤마다 모여 회의를 하였다. 그리고 농장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1966년 11월에는 조합의 정관을 만들었다. 이듬해인 1967년 3월 수확한 쌀의 양이 생각보다 많아서, 그들은 벼농사에 이어 밀과 콩도 경작하였다. 하지만 넓은 면적의 농장에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농기계 마련이 필수”라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 정부에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4만 달러의 자금을 보내 주었는데, 그들은 3만 달러로 추수 기계 1대와 트랙터 3대를 구입하고, 나머지 1만 달러는 영농 자금으로 충당하였다. 그 결과 산타마리아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1971년 9월 INCRA[Instituto Nacional de Colonização e Reforma Agrária]에 농장을 정식 등록하고, 그 이듬해인 1972년에는 가구별로 30알켈[약 70만㎡]씩 농지를 분할하고 등기를 하였다.
가구별로 분배를 받은 농지의 면적은 동일하였지만, 경영 면적은 가구당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가구마다 트랙터와 콤바인 등이 장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단위 면적당 수확량은 브라질 일반 농가보다 평균 20~30% 높게 나왔다. 그리고 한인들은 농가소득을 증대하기 위하여 농장 생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동안 재배하던 토마토와 채소 대신, 콩, 복숭아, 포도, 피칸 등의 견과류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식용 닭[육계]도 키웠다. 따라서 그들은 ‘농업으로 성공한 사람들’로 불리기도 하였다. 1976년 당시 산타마리아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한인 가구는 11가구에 불과했으며, 그중 9가구는 축산업을 겸하였다. 그럼에도 1970년대 후반 한인들이 일구어낸 산타마리아 농장은 브라질 지도에 ‘한인들이 개간한 농업 지역’이라는 뜻의 ‘콜로니아 코리아나(Colonia Coreana)’로 표시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농장의 규모도 컸을 뿐만 아니라 한인들이 생산해 낸 농작물의 품질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타마리아 농장은 1960년대 5차에 걸쳐 송출된 브라질 집단 영농 이민 중 1980년대 중반까지 일부 가구가 남아서 농사를 짓는 등 유일하게 농업에서 성공한 사례로 꼽혔으나, 2024년 기준 모든 가구가 상파울루로 이주하여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