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야 | 역사/근현대 |
|---|---|
| 유형 | 지명/시설 |
| 지역 |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봉 수세수 |
| 시대 | 현대/현대 |
| 개관|개장 시기/일시 | 1963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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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설립지 |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봉 수세수 |
| 원어 항목명 | Fazenda Seul |
| 원어 주소 | Bom Sucesso, São Paulo, SP, Brasil |
| 성격 | 한인 농장 |
| 면적 | 30아우케이리 |
1963년 브라질로 건너간 제1차 집단 영농 이민자들 중 일부가 상파울루시 인근 봉 수세수 지역의 일본인 농장을 임대하여 만든 농장.
1962년 5월 브라질 정부가 한국인의 영농 이민을 허가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그해 3월 9일 제정, 공포한 법률 제1030호 「해외이주법」을 근거로 제1차 집단 영농 이민 희망자들을 심사하여, 그중 103명에게 해외 이주 허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제1차 영농 이민자들은 성격상 두 그룹으로 구분되었다, 한 그룹은 가족과 함께 브라질에 도착한 17가구[고계순, 안계승, 한승일, 윤명섭, 김종혁, 안동협, 김철현, 서재옥, 김덕조, 장만식, 장상기, 유재선, 양승갑, 한용전, 조중한, 김승한, 정명자로 총 92명]였고, 또 다른 그룹은 이민 수속 중인 가족을 한국에 두고 합류한 11명[박선관, 한승엽, 김해곤, 김명익, 권태영, 윤봉선, 이정수, 김종수, 주성철, 김종한, 김상현]이었다. 이 두 그룹은 55일 동안의 선상 생활에서도 화합하지 못하여, 브라질 도착 후 여러 농장으로 분산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63년 2월 12일 브라질에 도착한 제1차 영농 이민단은 상파울루주가 운영하는 브라스 이민수용소에 머물렀다. 그들 중 재력이 있던 12가구가 기존의 일본인 농장을 구입하여 가장 먼저 수용소를 빠져나가 만든 것이 아리랑 농장이다. 나머지 5가구는 브라스 이민수용소에서 두 달 정도 더 머물다가 상파울루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곳의 땅을 빌려서 양계와 채소 농사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서울 농장이었다.
1차 영농 이민자들 중 11명[박선관, 한승엽, 김해곤, 김영익, 권태영, 윤봉선, 이정수, 김종수, 주성철, 김종한, 김상현]의 가족은 나중에 브라질에 도착했는데, 그들 중 4가구[박선관, 김명익, 박경곤, 신영균]는 개별적으로 파라나주(Paraná州) 폰타그로사(Ponta Grossa)에 농장을 마련하고, 토마토 재배와 양돈업을 시작하였다.
1차 농업 이민자들은 하선하자마자 곧바로 미라카투 베아 농장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민 브로커 김수조가 토지권을 주장하는 원주민들의 극심한 항의로 입주하지 못한다고 설명하며, 그들을 곧바로 상파울루주가 운영하는 브라스 이민수용소로 데려갔다. 참고로 브라질이 브라스 이민수용소를 건립한 것은 19세기 말부터 이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민자들은 산투스항에서 브라스 이민수용소까지 직통으로 연결된 기차를 타고 도착하였고, 수용소에서 3일 정도 머물다가 상파울루 인근의 커피 농장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1960년대에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브라질 내 가장 가난한 북부와 북동부로부터 상파울루로 무작정 도착한 브라질인들도 이 수용소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며 일자리를 찾아 나갔다고 전한다.
1963년 2월 12일 브라질 산투스항에 도착한 1차 한국 영농 이민자들 역시 브라스 이민수용소까지 기차를 타고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렀는데, 17가구 중 자본력이 있는 12가구가 상파울루 서북쪽 자구아레(Jaguaré)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농지를 구입해서 이민수용소를 떠났다. 하지만 농장을 구입할 수 없었던 5가구[김승한, 한승일, 안동협 등]는 브라스 이민수용소에서 두 달 더 머물렀다. 그리고 상파울루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봉 수세수(Bom Sucesso)에 있는 이와이[岩井]라는 일본인 소유의 땅 가운데 약 30알켈을 1년에 2만 크루제이루에 빌려서 양계와 채소 농사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서울 농장이다. 이후 이인길, 권순국, 차신환 등 4가구가 더 합류하여 총 9가구가 되었다. 참고로 브라질 한인회의 1993년 자료에는, 6가구[김승한, 서재성, 강재성, 김종혁, 김철현, 조남훈]가 먼저 서울 농장에 정착하였다고 나온다.
서울 농장에 입주한 사람들은 먹을 것조차 자급자족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들은 나중에서야 브라질의 원시림에서는 대규모 기계 농법이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은 한국식으로 농사와 양계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1만 5000마리의 닭을 키울 정도로 나아졌다. 그러나 서울 농장이 자리한 곳은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다. 처음에는 자녀들을 상파울루 시내 학교로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으나, 자녀들을 교육하고자 어떻게든 상파울루 시내에 아이들이 머물 거처를 마련하여 두 집 살림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1963년 말부터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농장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1965년에는 모두 상파울루 시내로 이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