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崔貞植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멕시코 멕시코시티 멕시코 타바스코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71년 |
|---|---|
| 몰년 시기/일시 | 1942년 6월 6일 |
| 추모 시기/일시 | 2017년 |
|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용산리 115 |
| 거주|이주지 | 멕시코 유카탄주 |
| 활동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 |
| 활동지 |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
| 활동지 |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 프론테라 |
| 활동지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묘소 | 멕시코 멕시코시티 공동묘지 |
| 원어 주소 | Mérida, Yucatán, México|Veracruz, México|Ciudad de México, México|Tabasco, México |
| 성격 | 독립운동가 |
| 성별 | 남 |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법무원 |
1905년 5월 멕시코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법무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멕시코로 노동 이민을 간 최정식[1871~1942]은 1909년(순종 3)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평의원, 1913년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 법무원, 1917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법무원, 1919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서기 및 수전위원, 1939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감찰원 등을 역임하였다.
최정식의 큰아들은 『교포역설』을 쓴 최병덕[호세 산체스 팍(José Sánchez Pac)]이다.
최정식은 1871년(고종 8)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용산리 115번지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또 다른 자료에는 서울 남서(南署) 죽동(竹洞) 출신이라고도 한다. 1905년(고종 42) 5월 멕시코 유카탄으로 노동 이민을 가서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였다. 1908년(순종 2) 12월 28일 어떤 일본인이 산으리·초촐라 등의 농장에 찾아와서 “너희는 우리 보호국 백성이기로 내가 너희를 관할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최정식이 “매국적 몇 놈이 있어 소위 보호조약은 하였다 하나 우리 국민은 당당한 독립국 백성이오. 또한 너희 일본은 우리의 역사상 원수라. 우리가 죽을지언정 너희 같은 왜놈의 보호를 받을 리가 있느냐.”라고 하며 호통을 쳐서 내쫓은 일이 있었다.
1909년 5월 9일 유카탄주 메리다에서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창설될 당시 평의원에 선출되었고, 5월 29일에는 학무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멕시코의 베라크루스주 헤수스 카란사 와하케뇨로 이주하여 1912년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 학무원에 선출되었고, 1913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다시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법무원으로 보임되었고, 1919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서기로 선정되었다. 1917~1918년 안창호가 유카탄주를 방문하였을 때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고,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 운영하는 해동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1922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학무원, 1924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 프론테라로 이주하여 프론테라 국어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8년 프론테라를 떠나 푸에르토 멕시코[베라크루스주 코아트사코알코스]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939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감찰원이 되었고, 같은 해 3.1절 경축식에서 ‘33현이 독립을 선언한 논리’에 대해 진술하였다. 1940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대표원으로 선출되었고, 동년 3.1절 경축식에서 연설을 하였다. 1941년도 대한인국민회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감찰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였다. 1942년 6월 6일 멕시코시티에서 73세로 별세하였다.
1909년부터 1939년까지 의무금, 인구세, 3.1적립금, 3.1성금, 2.1성금, 국민부담금 등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2017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최정식의 공적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