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큐바 한인 신분증명서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쿠바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원어 주소 Cuba
영문 주소 Cuba
정의

1940년대 초 미국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가 쿠바 한인들에게 발급한 신분증명서.

제정 경위 및 목적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 9일 쿠바는 미국 편에 서서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일본 영사관을 강제 철수시켰다. 한일병합 후 국적이 모호해졌던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오해받거나 첩자로 의심받기도 하였다. 이에 미국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는 대일본 투쟁과 미국 지지를 표방하며 재미 한인들을 보호하고자 한인 신분 증명서를 발행하였다. 또한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을 위해 재미 멕시코 및 쿠바의 공사들과 교섭하여, 멕시코와 쿠바 거주 한인들이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체포되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42년 6월 15일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에게 스페인어로 된 증명서를 발급할 수 있었다.

쿠바 한인들은 1942년 7월 4일 미국 독립 경축 행렬과 12월 9일의 쿠바 ‘선전’ 기념 제1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는 등 일본과 적대 관계에 있음을 지속적으로 인식시킨 결과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쿠바 지역 3개 지방회[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가 1943년 4월 4일 출범시킨 재큐한족단[Colonia Koreana de Cuba]은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정치·외교적 성격의 재큐한족단은 임시정부 후원, 대한인국민회 옹호, 재쿠바 동포 안녕 보장, 한국 독립 승인 선전 공작, 독립 후원금 모집 등을 활동 목표로 하였다.

변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되자 쿠바 한인 사회에서는 광복을 기리는 시위 행렬을 벌였고, 또 대일 승전을 축하하는 행사를 벌이는 등 각종 집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에네켄 농장이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실제 광복 후 쿠바의 한인 사회는 당시 쿠바의 외국인 고용 차별 정책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당시 쿠바 정부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고자 노동법을 강화하여 그때까지 쿠바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한인들은 취업 및 고용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많은 한인이 이 시기에 쿠바 국적을 취득하게 되는데, 이는 생존권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의 하나였다.

의의와 평가

재큐바 한인 신분증명서는 태평양전쟁 시기 쿠바의 한인들이 한국인이라는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서류로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임천택, 『쿠바 이민사』(태평양주보사, 1954)
  • 서성철, 「쿠바 한인이민사」(『이베로아메리카연구』11,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2000)
  • 안금영, 「중미지역 초기 한인 사회에 있어서 국민회의 역할」(『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5-2, 고려대학교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2012. 11.)
  • 『신한민보』(1942. 7. 16.|1942. 7. 23.|1942. 8. 20.|1943. 6. 17.|1943. 8. 5.)
  • 한국사 총설 DB_중남미 한인의 역사(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oksr_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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