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興民國語學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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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쿠바 아바나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개교 시기/일시 | 1937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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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설립지 | 쿠바 아바나 |
| 원어 주소 | La Habana, Cuba |
| 성격 | 한인 학교 |
| 설립자 |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 |
1937년 4월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에서 한인 2세의 국어 교육을 위하여 쿠바 아바나에 설립한 학교.
서병학의 주도로 1937년 1월 17일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4월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에서 아바나 한인 2세들의 국어 교육을 위하여 흥민국어학교를 설립하였다. 『신한민보』 1937년 8월 19일 자 「안남산군 하혈증으로 신고」라는 기사에 흥민국어학교 교장으로 안순필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기사에는 안순필의 아들 안남산은 낮에는 쿠바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흥민국어학교를 다닌다고 나와 있다. 지방회의 서기로 활동하던 서병학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국어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도 함께 학습을 하였는데, 학생들은 대한인국민회 2.1 창립 기념일, 3·1절 경축식 등에서 애국가와 국기가 등을 합창하였다.
흥민국어학교는 1939년에 교사를 선임하지 못하여 폐쇄하였다가 그해 12월 국어 교육을 야간에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1년 1월 쿠바에서 정변이 일어나 집회를 할 수 없게 되어, 사실상 흥민국어학교의 운영이 정지되었다. 또한 같은 해 12월 7일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이후 쿠바 정부가 전시 계엄령을 반포하여 모든 집회 행사가 금지되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후 쿠바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신분상의 안녕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아바나의 라디오에서 한국인은 일본인과 같다고 방송하였기 때문에, 쿠바 정부에서 한인들을 일본인과 같이 감시하여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에서도 쿠바 국방위원장이 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한다는 발표를 하면서 한인들은 금족령을 당하였다. 이렇듯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쿠바 지역 국민회의 집회를 열 수 없었는데 아바나지방회의 경우에는 1942년 2월 중순부터 집행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쿠바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닌 ‘자유 한인’임을 밝히는 데에 총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2년 2월 중순 집회의 자유가 허가되면서 안순필과 서병학의 집에서 한인 2세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1944년 12월 당시 아바나 지방의 한인 학생은 소학생 11명, 중학생 5명, 전기학 학생 1명 등 총 16명에 불과하였다. 흥민국어학교에서 국어를 배울 학생들이 없었고, 교사와 재정이 부족하여 학교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아바나에 한인들이 몰려들면서, 아바나 안순필의 사택인 솔(Sol)가 409번지 3층 옥탑에서 흥민국어학교를 다시 개설하여 한인 2세와 3세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