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大韓人國民會-地方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 사서함 17호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설립 시기/일시 | 1918년 |
|---|---|
| 개칭 시기/일시 | 1928년 9월 |
| 최초 설립지 | 멕시코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 사서함 17호 |
| 원어 주소 | Apartado No.17, Frontera, Centla Municipality, Tabasco, México |
| 성격 | 독립운동 단체 |
| 설립자 | 김세원|이학서|신오삼|김제선|방한조|김우용|김경국|김태진|김문옥|김순일|김양수|신이서 |
1918년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이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에 설립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타바스코주 센틀라시 프론테라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1917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 지방회 설립을 청원하였고, 1918년 정식으로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를 결성하였다. 당시 회장은 김세원이 맡았고, 부회장에 이학서, 총무에 신오삼, 서기 및 학무에 김제선, 재무에 방한조, 구제에 김우용, 외교에 김경국, 대의원에 김태진, 사찰에 김문옥, 평의원에 김순일·김양수·신이서 등이 선임되었다.
1910년대 초반 한인 노동자들은 센틀라시 지역에서 농장주와 협조하여 자치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한인 헌장까지 선포하였다. 한인 마을은 가나안의 복지를 꿈꾸듯 ‘신한동(新韓洞)’이라고 불렀다. 이후 1917년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청원하여 이듬해 공식적인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를 결성하여 한인 사회의 결속을 다지고자 하였다. 그러나 멕시코혁명이 일어나면서 농사를 짓기 어려워지자 1921년 대부분의 한인들이 쿠바로 이주하였다. 회원들이 쿠바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의 모든 서류와 집기도 쿠바로 옮겨 갔다.
이후 프론테라에 남은 한인들은 여전히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의 이름을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공인덕이 회장을 맡고 총무에 여춘근, 서기 및 학무원에 김태진, 재무에 임억복, 법무원에 유성여 등을 선임하였다. 그러나 1928년에 들어서면 나머지 한인들마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프론테라가 알바로 오브레곤(Alvaro Obregón)으로 바뀌면서 그해 9월 열린 통상회에서 단체의 이름을 대한인국민회 알바로오브레곤지방회로 고쳤는데, 이후 도시 이름이 다시 프론테라로 바뀌었다.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 의연금을 모금하는 한편, 왜화배척(倭貨排斥)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선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멕시코 여러 곳의 교회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지방회관 내에 국어 소년학교를 설립하여 국어 교육도 실시하였다.
2024년 기준 프론테라 외곽 그리할바강 변에 한인들이 살았던 집 몇 채가 남아 있지만, 한인 마을은 그리할바강이 범람하면서 흔적만 남았다. 프론테라 시립 공동묘지에는 한인들의 무덤이 있고, 프론테라시는 한인 후손들이 살고 있다.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는 1919년 3·1운동 때에 독립 의연금을 모금하는 한편, 왜화배척 운동을 전개하였고, 「독립선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멕시코 여러 곳의 교회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대한인국민회 프론테라지방회관 내에 국어 소년학교도 설립하여 국어 교육도 실시하였다. 프론테라 지역 정착 초기에는 한인 마을을 ‘신한동’이라고 부르고 자치 제도와 한인 헌장을 발표하였고, 이후 지방회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당시의 한인들이 얼마나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고 또한 애국심을 간직하고 있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